진리의 구체적 사례인 2+2=4를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주의 모든 곳에서 참이다. 항상 참이다. 이 진리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세 가지 핵심 속성, 즉 편재성(어디에나 존재함), 영원성(항상), 불변성(불역성)을 지닌다. 불변성은 단순히 변하지 않음보다 더 강한 개념이다. 진리가 변하지 않음만이 아니라 변할 수 없음을 말한다. 진리의 이 세 가지 특징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편재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 진리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임을 우리는 마음속 깊이 알고 있다. 이것은 인간 차원에서 우리의 반응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므로, 우리 인간의 반응은 피조물 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을 반영한다. 하나님과 진리의 자연스러운 관계는 어떨까? 하나님은 자애로우시며 진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위격들이 “상호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구체적인 구절들에서 이 가르침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해 우리가 살펴본 내용에도 암시되어 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진리를 온전히 아신다.
번 S. 포이트레스 – 진리, 신학, 관점
전통이 “모든 계급 중 가장 알려져 있지 않은 이들, 곧 우리의 조상들에게 투표권을” 주어 “선거권을 확장”하는 과정이라면, 전통사를 연구하는 이들은 전통이라는 피아노 협주곡 중 피아노 독주자(그중에서도 탁월한 연주자)의 소리만 들어서는 안 되며, 오케스트라의 소리에도 귀 기울여야 합니다. 밀먼 패리가 역사 속에서 전통을 다시 발견하는 가운데 호메로스라는 한 사람(혹은 사람들)의 시인을 넘어, 무명의 음유 시인들과 전통의 전수자들에게, 더 나아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부족에 있는 호메로스 전통의 정당한 후계자들에게 나아갔듯 말이지요. 물론 이 이야기에는 탁월한 독주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목 있는 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탁월한 독주자의 연주에 빠져드는 기쁨을 놓칠 수 없겠지요. 전통사 연구자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살피려 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를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이른바 ‘영웅 사관’을 피해야 합니다.
야로슬라프 펠리칸 – 전통을 옹호하다
우리는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첫 번째로 삼아야 한다. 먼저 하나님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럴 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첫 번째로 삼으셨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먼저 구하라고 요구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분께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주셨다. 하나님은 그냥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기로 ‘미리’ 결정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월급 받기 위해 하는 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일은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을 무엇으로 여길지 미리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충성된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 하나님은 우리 입에서 나온 단 한마디 격려의 말로도 누군가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으실 수 있다. 바로 내 삶이 그 증거다. 이것이 내가 오늘날 목회를 하고 있는 이유다.
크레이그 그로쉘 – 미리 결정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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