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위로하고 위로받는 방식이나 형태는 다양하다. 몸이 아플 때 닭죽을 가져다주거나 슬픈 일을 당했을 때 꽃바구니를 보내주기도 하고, 실직했을 때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거나 안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간단한 말 한마디다. 위로의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있는 복잡한 갈등을 이겨내고 담대하게 설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제자들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근심을 갖지 말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그들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해줄 것이라며 위로하고 격려하셨다.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위로와 힘이 된다.
토머스 넬슨 –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 101가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충분히 열심히 일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내 삶을 구원하셨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그분께 나의 시간을 드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더 합당하거나 거룩하거나 영적이거나 순결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마치 내 안에 나를 대신하여 말하는 어떤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할 땐 내가 무슨 말을 하게 될지 몰랐지만, 떠오른 모든 말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새로운 힘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은 내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 이해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로 인해 손뼉 치고 크게 웃고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었다. 내 삶에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 무엇도 내게 더 큰 기쁨을 줄 수 없었다.
멀린 캐러더스 – 감옥에서 찬송으로
내가 하나님의 언덕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은 거대한 쇳덩이는 ‘의심’이었다. 정말 하나님은 날 사랑하실까? 정말 하나님은 선하실까? 정말 하나님은 언제나 날 위해 최선의 것을 준비하실까? 정말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나. 의심의 뿌리는 제법 깊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의심의 정중앙에 선악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기독교를 안 믿는 누군가가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들었어? 선악과를 만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라고 물을 때, “물론이지, 선악과를 만드신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선악과 사건의 핵심은 선악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선악을 아느냐에 있었다.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아는 것에 대해 하나님이 샘을 내고 싫어하신 게 아니다. 문제는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따 먹어서 알게 되는 선악이 하나님의 선악과 다르다’는 데 있었다.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의 선악’과 ‘나의 선악’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김민정 – 감춰진 은혜 선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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