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2천 년 예수의 말을 이해하는 것에도 거친 길이 있고 큰 벽이 있다. 예수가 전달하려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김호경 교수(前 서울장로회신학교 신약학)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노력했으며 그 여정 속에서 예수의 식탁을 만났다. 이 책은 예수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의 의미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
식탁 위의 음식이 볼거리가 된 SNS 시대, 많은 양과 빠른 속도의 먹기가 흥밋거리가 된 먹방 시대에, 저자는 식탁 위의 음식이 아니라, 예수의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을 경험하게 한다. 식탁 교제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결국 그리스도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선사한다.
저자는 책 속에서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의 식탁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하다.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행위를 의사가 병을 고치는 일과 동일시했다. 그것은 회복이며 구원이었다. 예수와의 밥은 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며 그들을 일으킨다. 밥 한 끼가 지속적인 죄인의 굴레를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고 했다.
이어 “구원은 아마도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수많은 ‘끼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 ‘끼리’의 관계를 넓혀 가면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래서 예수는 성전이 아니라 집에서 구원을 선포한 것이 아닐까? 성전에는 늘 변하지 않는 ‘끼리’들만 있으니 말이다. 구원은 끼리의 변주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끼리의 변주는 결국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너는 안 돼!’라고 했던 야멸찬 절벽을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를 넘어설 수 없어!’라는 냉정한 금지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함께할 일 없었던 이들이 함께 둘러앉은 상이 얼마나 복된 구원의 징표인지를 알려 준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의 모든 식탁은 단순히 배를 불리는 곳이 아니라 구원을 경험하는 표적이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과 함께 나눈 식탁은 이러한 표적의 연속선상에 있다. 예수는 ‘먹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늘 누군가와 먹으며 다녔다. 그런데 그의 식탁은 유별났다. 그는 죄인들과 밥을 먹었으며, 밥을 먹을 때 지켜야 하는 정결법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 때문에 예수의 식탁은 늘 바리새인들의 도마에 올랐다. 그의 식탁은 더러웠기 때문이다. 표적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은 예수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은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것으로 기쁨을 삼았다. 반면에 표적을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도 그를 따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고난의 길에서, 그들은 예수의 삶을 살려고 애썼을 것이다”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무슨 대단한 기적이나 놀라운 능력이 아니더라도 제자들의 일이 예수의 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렇듯 먹이는 표적을 통해서다. 누구든지 올 수 있는 열린 식탁, 디베랴 호숫가의 식탁처럼 아무것도 묻지 않는 따뜻한 식탁, 그 식탁을 통해서 제자들도 자라며 예수의 생명은 이어진다. 언제, 어디서든 그의 사람들을 따라 떠도시는 하나님과 함께 말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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