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모르지만 분명 좋은 이유가 있을 거야’라는 확신으로의 전환. 이것은 근거 없는 헛된 믿음이 아니라 내 삶의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은 선하고 신실하시다는, 느슨해진 믿음의 끈을 꽉 조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순간 사실로 증명된다.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아간다면 반드시 영적인 유익이 따른다. 그러니 생각의 에너지 분배를 잘해야 한다. 가능한 남은 힘을 긁어모아 계속 살아 있기 위한 내 몫의 일을 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하나님께 몰입하여 깨닫게 된 생각과 이미지를 쏟아내는 작업이 나에게는 최소 호흡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 활동이다. 시들었을지라도 살아 있음으로 살아가자. 가만히 있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고 진동하며 쿵쾅거리는 우리의 몸처럼, 미동도 없는 것 같은 24시간을 힘 있게 나누고 쪼개어 그 틈으로 기쁨도 감사도 흐를 수 있도록.
이은혜 – 받아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장막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장막 인생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장막 인생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자족합니다. 싸우지 않습니다. 떠날 것을 알기에 관용을 베풀어 줍니다. 장막 인생은 몸집을 키우는 일에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낯선 땅은 어떤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낯선 경험이 낯선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생의 바닥이 바로 낯선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과 수동태가 되는 그 경험이 낯선 땅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고 낮은 곳에 복된 기회를 감추어 두셨습니다. 복된 기회는 만남을 통해 주어집니다.
강준민 – 새 변화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
예수님은 ‘거룩함’이라는 척도가 지배하는 유대교 사회적 세계에 새로운 척도를 제시했다. ‘자비’가 그것이다. 자비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함께 아파하는 마음, 타자의 약점까지도 품어 안으려는 마음이다. 예언자의 말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 노래가 아니다. 그들의 말은 둔감한 영혼을 깨뜨리는 도끼날일 때도 있고, 사람들 속에 숨겨져 있는 생명을 깨우는 봄볕일 때도 있다. 가냘픈 갈대 피리 같은 우리 속에 숨을 불어넣으시어 하늘의 선율을 연주하게 하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예수 정신은 어떤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 아낌만 한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아낌을 경험할 때 사납고 무정한 세상을 건널 힘이 우리 속에 유입된다. 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지만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듯이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이제 그만’이란 말을 모르기에 삶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돈이 중심이 되는 순간 아름다운 관계는 파탄 나고, 공동체도 파괴된다.
김기석 – 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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