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자들이라거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듣는다거나 믿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성도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대상(對象)이 되고 성도는 그 대상 옆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넓은 품 안에 들어가서 그 안에 넉넉하게 안기는 모양이 됩니다. “안에”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에 들어오기 전에 빌립보에서 환란을 겪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환란을 겪었으며, 베뢰아에서도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의 선교 여정 전체가 환란의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이 바로 이점을 깨닫고 환란 가운데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된 표지임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시면류관을 머리에 쓰셨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장미의 면류관을 써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훗날 루터가 말한 격언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은 먼저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상원 – 데살로니가전후서
‘구원 얻는 믿음’(칭의적 믿음)은 단회적 사건이지만, ‘예수를 닮아가는 믿음’ 즉 ‘예수다운 믿음’(예수다움)은 점진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이를 ‘성화적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조되는 믿음은 성화적 믿음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진 칭의적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는지를 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들은 세상에 보이기 마련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의를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성화는 칭의(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칭의 또한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칭의적 믿음이 튼튼하고 강할수록 성화적 믿음도 아름답게 열매 맺기 때문이지요!저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 이후, 칭의적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신앙고백은 자기가 믿는 믿음에 대한 고백(칭의)이든, 성화적 고백이든 모두를 포함합니다.
최기열 – 디매오의 아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아는 일입니다. 나를 알아야 정체성이 생깁니다. 이 세상도 내가 있기에 그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인데 나를 모르고 산다면 그 사람은 어둠과 혼돈 속에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최대의 지혜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인간 탐구가 계속되고 있지만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나를 아는 일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나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나를 아는 지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지성인들의 자신을 무신론자로 자처하는 것을 스스로의 긍지인양 생각합니다. 오만을 피우고 고집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신앙을 이성의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불청객으로 오인하고 있으나 신앙은 이성의 문을 조용히 두드릴 뿐입니다.
염성철 – 치유와 회복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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