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8장에서는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자인 므낫세와 차자인 에브라임을 야곱이 손을 엇갈리게 놓고 축복하려 하자 요셉이 만류한다. 그때 야곱이 거절하며 요셉에게 말한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9) 이것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 있다. 야곱은 장자와 차자가 누구라는 것을 안다고 말했지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는 말을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그것은 요셉이 장자와 차자의 축복이 뒤바뀌는 것을 염려하는 마음뿐 아니라 야곱 자신과 요셉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세월을 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나에게 “내가 안다. 내가 안다”라고 하시는 것 같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한없는 위로가 된다. 그냥 알아주는데 왜 위로가 될까? 진주는 조개에 상처가 생겨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처 없는 진주란 있을 수가 없다. 조개가 상처를 두려워하면 진주는 만들 수가 없다. 기왕에 상처가 생겼으면 진주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옥진 – 그대, 당신의 기쁨과 슬픔을 그분이 아십니다
“부탁합니다”는 삶에 대한 1인칭 복수형 접근법이다. 이것은 ‘나’를 ‘우리’로 바꾼다. 이것은 윈윈(win-win) 전략, 곧 양쪽 모두 득을 보는 방법이다. 스티븐 코비는 말했다. “윈윈 전략은 제3의 길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당신의 길도 아니요, 나의 길도 아니다. 이것은 ‘더 좋은’ 길이다. 더 높은 길이다.” 여기서 나는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나는 한 가지 단순한 원칙에 따라 산다. “당신이 이기지 않으면 나도 이긴 것이 아니다.” 가장 큰 자는 남을 섬기는 자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기보다는 가장 낮은 자리로 가서 앉으라! 뭔가를 받을 자격이 있더라도 꼭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라. 나는 담임목사이지만 내셔널커뮤니티교회에 관해서 말할 때 절대 1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교회는 ‘나의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이 교회는 내게 자식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25년간 이 교회에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나는 절대 이 교회를 ‘내’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모든 목사는 임시 목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목사는 어디까지나 목자이신 예수님 밑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마크 배터슨 – 부탁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왜 기독 병원인가? 기독 병원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본질적으로 선교 전략은 아니다. 기독 병원은 일반적으로 교회 성장의 도구로 사용되지만 교회의 권위나 성장을 촉진시키는 기관은 아니다. 기독 병원이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데 막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어떻게 하면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다. 기독 병원의 존재 이유는 오직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예수님이 고치셨다는 사실이다. 그 긍휼의 사역이 없이는 예수님의 복음이 결코 완전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위기는 매우 개인적이다. 어둠 속에서 절규하는, 잃어버린 한 영혼이다. 다른 어떤 기준에 의하면 기독 병원들이 비효율적이거나 부적절하거나 고비용이라 할지라도, 기독 병원은 이 절규에 응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직원 대부분이 잠자리에 든 시간에도, 야간 근무를 하는 의료 기사들과 당직 전공의와 당직 전문의들로 구성된 소수의 대원들이 이 한 생명을 붙들고 고군분투하며, 이 시간이 병원의 골든아워다.
설대위 – 상처 입은 세상,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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