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 흔히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둡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초점을 둘째 아들에게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을 향해 하셨으니, 예수님의 초점은 맏아들에게 맞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고 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중심인물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없다면,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없었다면 먼 나라로 떠났던 둘째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아들에게 무엇이든 줄 수 있습니다. 유산을 내어줌으로 아들이 당할 고통, 그보다 더 큰 고통을 아버지로서 겪어 내리라 각오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아들이 인생의 끝에 이르러서야 돌아올 것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유산을 주지 않아야 하지만, 주어야만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규현 – 회복의 여정
용서는 자유입니다. 용서는 용서하는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나 살자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원수를 내 마음의 보좌에 앉게 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보내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그가 한 행동이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용서는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 기회를 주게 됩니다. 우리 삶의 시작과 마침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어긋나면 하는 일마다 성공 가도를 달려도 일시에 정지하거나 이탈 또는 일탈하고 맙니다. 이때 그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 장소는 다름 아닌 가정입니다. 그래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인 것입니다. 관계 맺기 그리고 가정에서의 일상은 그만큼 어렵고 힘듭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만큼이나 말입니다. 아니, 십자가에서 죽듯이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 가정입니다. 내 관계의 중심에, 내 가족의 핵심에 십자가의 사랑과 헌신이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김기현 – 고난은 사랑을 남기고
과학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입니다. (그 과학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한 물건을 만다는 것은 기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연을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성경엔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창조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과학과 성경은 일치되어야 하는 것이 필연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교리(조직신학)는 인간의 사고능력으로 이해가 안 되는 성경의 부분들을 인간의 사고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 끊어진 부분들을 인간의 언어와 논리로 연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의 성경의 모든 부분들이 인간의 사고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 있습니다. 그것이 과학과, 그 과학을 이어주고 설명하는 인문학입니다. 이제는 인간이 그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성경을 교리로 한 번 걸러서 이해할 필요 없이 바로 성경을 쓰여 있는 그대로, 과학적 사실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명철 – 현대인의 눈으로 본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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