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면서, 성령을 보내서 교회를 세우시고, 만물의 회복을 향해 가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연결됩니다. 역사적 안목은 우리의 조급증을 치유하고 긴 역사 속에서 오늘 우리의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을 열어 줍니다. 이 역사를 제대로 읽었다면 우리는 하늘만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의 사명이 향할 곳을 주목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먼저 쓰고 사도행전을 썼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이 예수님에게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교회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것도 크게는 복음 이야기의 일부, 혹은 연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이런 분입니다’를 알려 준 뒤, 오래전 어느 한 시점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오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박영호 – 사도행전 선교적 읽기
우리 삶에도 때로 ‘현타’가 온다. 오감으로 느껴지는 현실이 너무도 커 보이고,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그럴 때는 얼른 ‘말씀의 안경’을 써야 한다. 말씀이 실상이 되도록 ‘믿음의 안경’을 써야 한다. 우리의 거짓된 육의 생각이 영의 생각을 이기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갈렙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렌즈로 삶을 바라보자. 그 말씀대로, 말한 대로 아버지께서 길을 내실 것이다. 간혹 작정기도를 마치면서 기도 제목이 응답받지 못해, 전보다 주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가 기도 자리에서 만난 분은 누구였을까? 그가 기도한 건 무엇이었을까? 내 육이 죽고, 영이 살아나길 먼저 기도하자. 비록 내 소망과 다르게 삶이 흘러가더라도, 미처 몰랐던 주님의 더 깊고 선하신 뜻이 발견되는 시간이 되길 소망하자. 그토록 내 힘으로 수고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들의 공급자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깨달을 때, 역설적으로 그것을 움켜쥐던 손에 힘이 풀린다. 아버지가 모든 걸 소유하신 분이라면, 내가 하나라도 더 소유하겠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되려 아버지께서 주목하시고 가치 있게 여기시는 일을 배우고 따라가게 된다.
유예일 – 육이 죽고 영이 사는 40일 작정기도
전도는 직업으로 삼기에 가장 부적절하다. 첫째 이유는 이에 쏟는 노력에 비해 보수가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전도에서 보수를 생각하게 되면 그 본질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계유지 방편으로서 전도를 권할 수 없다. 교회를 위해 하는 전도는 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전도이다. 즉 앞서 말한 두 번째 정신, 공명심과 같은 정신에 입각한 전도이다. 그와 같은 전도는 곧잘 논쟁을 일으킨다. 전도로 경쟁을 하거나 신도 쟁탈전을 벌이기도 한다. 신도를 늘리려는 생각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아직 교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을 데려다 회원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교회의 기운이 흐트러지고 늘 법정 같은 모양새가 된다. 흐트러진 기강을 바로잡고자 비평과 비난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그 본연의 목적인 구원이나 선행 등은 생각할 겨를도 없게 된다. 교회 확장을 목적으로 전도하면 이런 길을 피할 수 없다.
우치무라 간조 – 전도의 정신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