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로마서 12장 2절 말씀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떤가. 너무나도 이 세대를 본받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사실은 본받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이 휩쓸려 가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필자 본인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꼈고 그래서 글을 쓰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자리에서 맛을 잃지 않은 소금이 돼서 직장 안에서 그 맛이 충분히 발휘되기를 바라고, 또 예수님의 사랑이 반사되어 비추는 등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조영준 – 크리스천 경영인과 직장인
교회가 많은 만큼 교단도 많다. 교단이 많은 만큼 교인들도 많다. 그러나 정작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 교회와 교단과 교인은 충분하니 교회 다니라는 전도는 그만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예수 믿는 사람이 구원받지, 교회 다닌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구원론은 어느 곳에도 없다. 전북권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도에 열중하고 교회 개척에 많은 일들을 했다. 병원도 세우고 학교도 세웠다. 전도와 교회 개척, 건강하고 서양 지식을 많이 쌓은 기독교인들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전남 지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병자와 걸인, 고아와 함께 가난하게 살면서 어려운 생활을 겪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고 그 스승에 그 제자인 것이다. 전북 지역 기독교인들과 전남 지역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모습에 다른 점이 아주 많다.
임락경 – 우리 영성가 이야기
교회 개척의 부르심은 본질 목회와 공동체 목회에 대해 하나씩 실천하면서 시작되었다. 종말론적 신앙에서 말하는 그 ‘종말’은 삶 속에 날마다 일어나야 한다. 죽은 후에 가는 천국만으로는 신앙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교회가 어디에 세워졌는지는 중요하다. 교회 위치에 따라 목회 적용점이 다르다. 공동 목회를 하면서 얻는 유익은 크다. 모두 주도적으로 책임감 있게 목회를 하니 교회를 두루 살필 수 있다. 모이고 훈련받는 장소로서의 교회보다, 신앙의 유산을 물려준다는 의미에서 교회 공간이어야 한다. 루터(Martin Luther)는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칼빈(John Calvin)은 택함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거룩한 성도들의 공동체로 각기 교회를 설명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지기까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읽기가 있었다. 예배의 마지막은 세상으로 흩어져 마을에서 살아 내고, 직장에서 살아 내야 한다.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재학 – 우리는 날마다 교회가 무엇인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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