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성인을 경축하는 것은 그들이 경건하거나 완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구속과 거룩한 일을 행하시되 하고많은 것 중에 하필 인간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흠투성이인데도 말이다. “복음을 전할 최적격자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에 부적격자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단 한번도 예수님은 장내를 살펴 거룩한 삶의 최고 모본을 뽑아서 그 사람을 보내 그분을 널리 전하게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은 늘 실패자와 죄인을 보내셨다.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된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산산이 깨졌다가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만나서 다른 모양으로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려면 받을 자격 있는 것만 받을 게 아니라 정말 망가졌을 때 은혜와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은혜가 필요한 상황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고 하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은혜다.
나디아 볼즈웨버 – 어쩌다 거룩하게
그 시험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칠 용기가 있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모압 왕 메사와 같은 이교도들도 그런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고, 유대교에서는 완전히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 시험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할 힘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것을 이미 몇 번이고 보여주었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땅, 출생지, 아버지의 집, 그에게 친숙한 모든 것, 고향에 관한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전 장에서 그는 사랑했던 맏아들 이스마엘도 포기했다. 사라가 이미 폐경기에 접어든 상황에서 도착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선물임이 분명한 이삭을 그가 포기할 것이라는 데 대해 의심이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랍비 조너선 색스 – 생명을 택하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종이 되라고 초청하시면서 우리가 그가 하신 대로 세상을 사랑할 때 그의 사랑으로 둘러싸일 것이라고 보장해 주신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으로 오셨다. 그저 단순한 종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슬픔을 몸소 지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의 애통함을 짊어진 위대한 고난받는 종으로 오셨다. 고난받는 종은 만유의 주이시다! 이제 그분은 그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그의 사랑의 종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종의 삶을 살길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 삶은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실 때 우리 마음은 즉시 가난한 사람들과 불의와 학대로 고통받는 자들을 향하게 된다. 예수님 자신은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 삶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의 말씀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주시는 가장 위대한 약속은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셔서 그들이 자기를 부르는 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오대원 & 게리 패렛 – 종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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