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과 골고다를 생각하면 그 누가 거만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친히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하셨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높은 자리를 좇는단 말인가? 성육신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도 던진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목자는 누구인가?’ ‘우리 삶의 구유는 무엇인가?’ ‘지금 십자가의 역사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하나님은 너무나 거절하기 쉽고, 경멸하기 쉽고, 간과하기 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실 때가 많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겸손은 언제나 하나님의 방식이다. 우리는 첫 번째로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고, 두 번째로 도덕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고개를 숙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 고개를 숙이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데 이는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은 심판장이자 구세주이시기 때문이다.
개빈 오틀런드 – 겸손, 나를 내려놓는 기쁨
겸손이 복의 뿌리라고 한다면 평안은 줄기요, 자유는 꽃이요, 감사는 열매이다. 감사는 최고의 덕목이요, 최상의 품격이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 감사하는 만큼 행복해진다. 복음으로 인한 정체성은 소속감, 인정감, 자신감으로 확장된다. 소속감이 있기에 이제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그분의 자녀로 산다. 자신의 실체를 마주할 용기, 온 생애를 건 ‘존재의 용기’가 있는 자만이 회개로 나설 수 있다. 성경은 창조와 구원 법칙이 기록된 책이다. 이것을 압축하면 이신칭의이다. 바울은 이 이신칭의의 근거를 성경 속 아브라함에게서 찾는다. 주 예수께 연결되어 있으면 샘물처럼 끊임없이 기쁨, 감사, 온유, 화평, 인내, 충성, 헌신이 언제든지 솟구쳐 나오게 된다. 우리를 가득 채운 그 사랑이 때로는 몰아치는 폭풍우처럼, 때로는 불타오르는 횃불처럼 끊임없이 우리를 소망으로 밀고 가는 것이다.
김석년 – 로마서 365
만약 우리가 예수의 인격에만 집중하고 그가 이룬 것을 무시하거나, 그 인물에만 집중하고 그의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암울함 속에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슬픔 대신 기쁨을, 연약함 대신 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손쉬운 타협에 의해서나, 논쟁을 회피함에 의해서나, 예수는 붙잡고 복음은 거부하면서 그것을 얻을 수는 없다. 슬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영적으로 세상을 정복하게 된 자들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에 그와 가졌던 접촉이 가져다준 영감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그가 부활했다”는 메시지였다. 오직 그 메시지가 그들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었다. 오직 그 메시지만이 오늘날 우리에게 살아 있는 구주를 줄 수 있다. 기독교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국제 평화를 증진시킬 것이다. 그러나 국제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기 위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잃을 것이다.
J. G. 메이첸 – 기독교와 자유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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