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처음 기독교를 접하고 성경이 믿어지지 않을 때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고집했습니다. 성경이 사람에게 믿어지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이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않고는 창세기도, 성경도 결코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처음 믿음의 영안이 떠졌을 때, 그 순간은 ‘순식간’에 벌어졌습니다. 창세기를 부정하며 열띠게 “성경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라고 성경을 들이대며 반증을 펼치던 시간에, 갑자기 내 생각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순식간”에 성경이, 창세기가 믿어졌습니다. 나에게 무슨 변화가 생긴 것일까요? ‘기적’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이 믿어지는 기적 말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을까요? 빛과 어두움은 선과 악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우주 운행의 원리를 양(陽)과 음(陰)에서 찾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능력’은 사람의 지혜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답니다.
장순석 – 하나님은 화석도 창조하셨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의 성찬식 분위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성찬이 준비된 탁자는 흰 보자기로 덮여 있고, 성찬 예식을 집례하기 직전에 목사와 장로는 흰 장갑을 낍니다. 마치 장례식장에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성찬 예식 중에 목사가 낭독하는 성경 구절도 거의 대부분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엄숙하고 무겁게 들립니다. 분병과 분잔이 시행되면서 피아노나 오르간 반주는 한층 더 구슬퍼집니다. 성찬식에서 부르는 찬송가도 대개 이렇습니다.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얼마 후 떡과 잔을 받은 성도들이 훌쩍이며 슬픈 분위기는 더욱 고조됩니다. 이쯤 되면 나머지 사람들도 왠지 슬퍼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은혜를 많이 받은 것만 같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한국 교회 성도들은 성찬식을 예수님의 장례식이나 추도예배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성찬식은 분명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 아닌가요?” 하는 반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예식이 맞습니다.
이성호 – 성찬, 배부름과 기쁨의 식사
요한복음은 기존의 질서에 저항하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 사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인간의 욕심으로 채워지는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에 기생하는 종교 장사꾼들을 선명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망가진 기존의 질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의 제자들도, 그리고 예수를 찾아오는 몇몇 사람들도 예수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0년 된 환자를 고쳐주심으로 포스트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시면서 우리의 현실적인 삶의 자리가 적자생존의 폭력적인 삶의 자리임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이러한 불합리한 사회질서를 바꾸기 위하여 자신이 대항하는 시대정신이 보이고 있는 ‘죽임’이라는 방식으로 맞서기보다는 스스로를 십자가에 올리면서 살아가는 법에 관한 지혜를 제시하고 계십니다.
황창진 – 요한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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