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죄인이나 이방인들을 향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두려운 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를 뒤집으셨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세상을 오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라고 하셨다. 초점이 구원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계속 ‘그를 믿는 자’를 강조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3장에서는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 그를 믿어야 한다는 것, 복음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은 초점을 그분께 맞춘 대표적인 인물로 침례(세례) 요한을 또 거론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라는 침례요한의 고백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눈다.
나는 아니라는 고백
요한복음에는 침례(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에 비해 참 다양하고 많다. 침례(세례) 요한의 운동은 이스라엘을 넘어 전 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미칠 정도로 대단했다. 현대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이란과 이라크 지역의 만다이교(Mandā'iyya)라는 종파의 시조가 바로 그다. 10만 명도 안 되는 작은 종파이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시작된 영지주의를 2천 년 가까이 계승하고 있다.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요한복음 주석서에 의하면 침례(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종파를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침례(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서 주의 길을 예비한 자였음을 우리가 다 알지만 예수님 공생애 당시는 분위기가 달랐다. 사도 요한은 침례(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시에 사역했다는 보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경쟁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은근히 부각시킨다. 그들은 유대교 개혁 운동의 경쟁자 같은 분위기였다. 대세는 침례(세례) 요한, 침례(세례)의 원조도 그였다. 그는 회개를 선포하며 침례(세례) 운동을 벌였다. 요한복음에서는 묘하게 처리하지만 예수님도 그로부터 침례를 받았다. 그런데 예수님 편에서는 제자들이 요단강 건너편에서 침례(세례)를 베푸는 정도였지만 침례(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침례(세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시기하며 보고할 정도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러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11:11)라고 예수님이 극찬하셨을 정도로 침례(세례) 요한은 대단했다. 전무후무한 예수님의 극찬이다. 예수님은 그를 ‘큰 사람’이라 하셨다. 맞다. 성경을 통해 보면 볼수록 그의 인격이 존경스럽다.
예수님과 그는 세간의 비교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둘 중 한 분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한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예수님 주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된 반면에 침례(세례) 요한의 주변에는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침례(세례) 요한을 존경하고 따르던 제자들은 스승이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다. 또 새로운 스타가 된 예수님한테 은근히 질투와 시기심을 느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나 그런 태도로 제자들이 요한에게 달려왔다.
그러나 감정의 수준이 인격의 수준인데 침례(세례) 요한은 남달랐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고, 산수를 배웠으면 분수를 알아야 하는데 그는 자기 주제도 알고 분수도 안다. 누굴 탓하거나 신을 원망하며 좌절에 빠지지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 비록 침례(세례) 운동을 시작했지만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이스라엘의 회개가 목적일 뿐, 오늘날의 특허 개념이나 선도자의 특권의식 따윈 조금도 없다.
자기는 그저 ‘광야의 작은 소리’,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고 믿었다.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보냄을 받았는지를 아는 사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28절). 오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흥해야 한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말할 수 있는 언어 중 가장 고상한 고백을 한 거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모자라도 안되고, 넘쳐도 안 된다. 그저 주님만 흥하면 땡큐, 오케이라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그가 맞는다는 고백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결혼 잔치는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깊은 밤에 도착하고, 낮에 먼저 찾아오는 하객들을 신랑 친구가 맞아서 대접한다. 그러다가 신랑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가장 먼저 달려가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신랑 친구다. 그리고 결혼주간이 끝나는 날 신랑 신부가 하나 되는 것을 확인하면 친구는 “끝”(“It’s finished”)를 외치며 그 역할이 끝난다. 신랑이 오고 난 후 친구는 주목 대상이 아니다. 그래도 신랑 친구는 신랑 때문에 기뻐한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 침례(세례) 요한은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보며 기뻐했다. 그것도 크게 기뻐했다. “신랑은 예수님, 나는 들러리, 시기할 이유가 없다”는 명확한 태도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는 고백을 한다. 예수님도 흥하고 나도 흥하는 ‘덩달이’가 아니다. 도덕적, 의무적 고백인가? 아니면 지금 연기하고 있나? 아니다.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29절), 만족해서 속에서부터 터져나온 기쁨을 고백한 거다.
쉬운 일이 아니다. 상대방은 잘되고 나는 묻히는 거다. 그게 기쁘다? 하지만 요한의 기쁨은 진심, 자기는 손해 보면서 경쟁적인 친구가 잘되는 것을 보면서 만족하는 기쁨이다. 여건을 초월하는 기쁨, 온전한 기쁨, 영원한 기쁨,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적 기쁨이다. 불가능할 것 같지만 요한은 자신의 만족을 오직 하나님께 둔 사람, 그래서 가능했다. 물질이나 자리나 명예에 관심이 많았다면 라이벌 이식으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대부분은 치열한 경쟁 끝에 그것을 얻는 법, 그래서 나의 손해는 상대방의 이익이요, 상대방의 성공은 나의 실패다. 이런 사회 속에서라면 친구의 성공이 기쁘지 않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가장 민감해하는 것이 공정성이다. 무언가 불공정하다 싶으면 난리 난다.
그런데 침례(세례) 요한은 만족을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만족을 보다 영원하고 고상한 것에서 찾는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친구의 기쁨에 진심으로 동참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보다 가족이나 민족의 화목이나 행복에 더 만족할 수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영원한 것을 얻어야 하지 않나? 더 고상한 것, 더 신성한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요한의 기쁨, 하나님의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 그 마음은 부모의 마음이고 온 피조물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는 마음이다. 각자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처럼 기쁘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자유를 누려야 한다.
나는 쇠해야 한다는 고백
침례(세례) 요한의 위대함이 절정에 이른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자신은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거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오른다는 걸 알았을까? 자신을 사공으로 오해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나는 사공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런데 이 고백을 할 때 울상이었을까? 아니다.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이 고백을 했다.
예전 유머인데 우리나라는 한때 망할 뻔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야단칠 때 “망할 놈”이라는 말을 많이 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나라가 기적같이 성공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이유를 그 시절엔 코를 흘리며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부모들이 아이들 코를 풀어 줄 때 “‘흥’ 해라 흥!”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여기저기서 “흥해라, 흥” 그러다가 나라가 흥했다는 거다. 우스갯소리지만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요즘은 들리는 소리가 다르다.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흥해라”가 아니다. “밟아라, 죽여라” 깎아내리고 흠집내는 소리만 가득하다. 특히 정치권과 언론이 이를 주도한다. 나라 걱정은 뻥이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본다. 나라는 어떻게 되든 자기 정파에 유리하면 그만이다. ‘너는 쇠하고 나는 흥해야 하리라’가 우리의 현재 모습이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오랜 심성이 변형된 걸까? 이러다가 정말 다 같이 쇠할 지도 모르는데…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인정했다. 이 자세가 중요하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낫다는 것, 저 사람이 이 일에서는 탁월하다는 것, 지금 모든 기대는 저 사람에게 모아지고 있다고 인정을 하면 편해진다. 저 사람이 잘되어야 조직이 잘 되고, 가정이 잘된다. 나라가 잘되려면 저 사람을 밀어줘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인정이 부족하다. 잘 되는 사람을 더 키우는 분위기는커녕 결사적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유대인의 교훈 중에 이런 예화가 있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두 가게가 있었다. 물건값으로 경쟁하거나 손님을 놓고 서로 치열하게 다툰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서 이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하였다. 그 방법은 이랬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구하라 다 들어주겠다. 대신 원수 같은 옆집 사람에게는 그 두 배로 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화해의 방법은 어긋나고 말았다. 한 사람이 자기 한쪽 눈을 멀게 해 달라고 구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함이 이 정도다. 사람들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을 못 참는다.
성경의 인물 중 침례(세례) 요한만큼 칭송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교회사에서도 빛나는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을 흥하게 하고 자신은 쇠하는 길을 갔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예수님은 섬기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하셨다. 상대를 흥하게 하면 자신도 흥하게 되지만 상대를 쇠하게 하면 자신도 함께 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흥하게 하기 위해 자신이 쇠하는 곳으로 내려가신 것이다. 결국 인간은 흥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더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다. 상대를 흥하게 하는 자가 큰 자다.
『달덩이 전도자』라는 책이 있다. SBS 예술단장 김정택 장로의 간증집이다.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로 시작되는 인기 가요가 그가 작곡한 노래들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대중음악 연주가 겸 작곡자, 지휘자로 방송계와 밤무대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유명인이다. 그러나 그는 연주가 끝난 불 꺼진 무대를 뒤로하고 돌아갈 때는 늘 허탈감과 고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서 술로 달래보려 했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일을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식을 가려는데 전에 본 적이 있는 한 여자 전도사가 찾아와, “더 이상 죄짓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가더란다. 처음에는 너무 불쾌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 말이 맴돌면서 가슴이 답답해 회식에 못 간다고 양해를 구하고 무작정 차를 몰고 강변도로를 달렸단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면서 갑자기 엄청난 공포감이 그를 덮쳤단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차안에서 울부짖기를 “주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정신없이 집에 와서 먼지 덮힌 성경을 집어 들고 피아노 밑으로 기어들어가 하염없이 울며 회개했단다. 다 토해내니 어두움이 물러가고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시며 마음에는 감사가 넘치더란다.
회개 후에 그는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생활 습관들을 정리하는데 밤무대 출연마저 중단했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 저를 인도하소서” 기도했다. 그런데 자신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일까지 다 맡기니 하나님이 지금껏 전혀 맛보지 못했던 평안을 주셨단다. 생전 느껴 보지 못한 느낌! 헛된 것을 버리니 가치 있는 것, 보다 의미 있는 것이 깨달아진 거다. 그리고 하나님은 얼마 되지 않아 SBS 관현악단장으로 세워주셨다. 또 몇 년 후엔 합창단과 무용단을 합쳐 만든 예술단장의 직책까지 주셨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하나님은 장로로 세워주셔서 그때부터 전도에 불이 붙어 연주인 연예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전도했다. 그는 말한다.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을까?”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인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인 김수영 님의 『어느날 古宮(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 중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라고 적었다. 자기의 작음을 인정한다고 자신이 진짜 모래처럼 작아지나? 아니다. 겸손해지고, 경계심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치고, 자유로워지는 거다.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거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모래처럼 작아지셨기에, 정말 모래알 같은 우리를 태산처럼 존귀한 존재가 되게 하셨다. 작아지는 느낌인가? 침례(세례) 요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기꺼이 작아지라.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해야 하리라” 이게 우리가 취할 마땅한 자세여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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