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다. 첫 사역은 제자 부르기, 사실 불렀다기보다 찾아오는 제자들을 맞으셨다. 주님의 부르심은 침례(세례) 요한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한 다음 날, 자신의 제자 두 명과 함께 섰다가 거니시는 예수님을 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35-36절). 눈이 보배라고, 사람은 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말 그대로다.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두 제자에게 전날처럼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같은 증언을 또 한다. 사흘 연속 예수님을 증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나섰다(37절). 침례(세례) 요한을 너무 믿은 건가? 아니면 자기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이 너무 괜찮아 보인 걸까? 주저없이 따라간다. 시선을 끄는 것은 그 모습을 본 침례(세례) 요한의 태도다. 섭섭해하거나 배신감이 전혀 없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그런 감정이 꿈틀거릴 만한 상황, 우리 같으면 밥맛도 없고, 잠도 잘 못 잤을 것 같은데 침례 요한은 달랐다. 아니 따라가라고 한 거나 다름없다. 두 제자도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않는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운 것, 오셔야 할 분이 오셨고, 찾아야 할 분을 찾아간 꼴이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이 장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과는 다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상당수가 침례(세례) 요한의 제자였음을 밝혔다. 침례(세례) 요한이 생명의 통로가 된 것이다. 생명의 통로는 종착역이 아닌 예수님에게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어야 하는데 요한은 그 역할에 충실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봤기 때문이다. 두 제자,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밝혀지지 않은 다른 한 제자는 신학자들 대부분이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때 예수님은 그 두 제자에게 “와 보라”(Come and see)”고 하셨다. 그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다.
직접 보고 확인하라
“무엇을 구하느냐?”, 안부를 묻는 게 아니다. 왜 왔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목적을 묻는 거다. 그런데 두 제자의 대답은 마치 동문서답 같다.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38절) “어디에 기거하는지 알려 주시면 찾아뵙겠다”는 의미다. 이건 “말씀 한번 들어보겠다”가 아니라 아예 함께 생활하겠다는 자세, 진리에 목숨을 건 태도랄까? 구도자답다.
예수님은 흔쾌히 “와 보라”고 하셨다. 진리는 한순간에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같이 생활하며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과의 관계성 안으로 부르셨다. 그 날 두 제자는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머물렀다.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 번 들어봐야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고 예수님은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와 보라”고 하셨다. 만남의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그들의 눈이 열렸고, 그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본 것 같다. 그 만남이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절), ‘계신 데를 보고 함께 거했다’고 했는데 시설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조망권이 좋고, 환경이 좋아서? 수도권, 역세권이어서?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만 보고 함께했다. 10시라 했는데 오후 4시라는 뜻, 아마 리트릿(Retreat),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거하니’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메노’(μένω), 이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된다(38절에 ‘계시다’, 39절에 ‘계시다’ ‘거하다’).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다. ‘잠포지움’(Jamposium)이라는 말을 아나? ‘잠을 포기한 심포지움’이란 뜻인데 젊을 때 친구 집에 가서 함께 먹고 자면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잠포지움’이었다. CCC 때 농담 삼아 ‘한 이불 덮기 운동’을 했다. 잠포지움을 한 거다. 진지하게 인생에 대해 나누고, 민족에 대해 나누고, 사랑에 대해 나누고, 때로는 주제도 없이 얘기하며 서로 동질화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런 잠포지움(Retreat)을 통해 제자화되고, 선교의 비전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날 두 제자는 예수님의 눈길을 직접 대했다. 예수님과의 눈 맞춤, 그 눈 맞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께 마음 문이 열렸다. 그렇다. 눈은 마음을 전하는 통로다. 표정은 꾸밀 수 있지만 눈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는데 눈을 마주 대하는 것이 진정한 만남이다. 요즘 가정이 잘 깨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눈 맞춤이 사라진 것 때문일 수 있다. 가족들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TV와 신문만 뚫어지게 보며 정작 가족 간에 서로 눈은 잘 안 맞춘다. 교육도 눈 맞춤에서 시작되는 것, 눈 맞춤이 회복되어야 한다.
우리말은 눈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학문이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을 ‘눈이 뜨인다’고 하고, 남녀가 사랑하게 되는 것을 ‘눈이 맞았다’고 한다. 적령기가 되었는데도 결혼을 못하고 있으면 ‘눈이 높다’고 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는 ‘눈에 어린다’ ‘눈에 선하다’고 표현한다. 어린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고, 큰 업적을 남기면 ‘눈부신 성과’라 하며, 거짓이나 사기를 치면 ‘눈을 속인다’ 그러고, 미워하는 것은 ‘눈을 흘긴다’고 하며 마지막 죽는 것은 ‘눈을 감는다’로 표현한다. 인생을 눈으로 설명하는 거다. 정리한다면 인생은 눈 떠서 눈을 맞추며 사는데 때로는 흘기며 속이며 살다가 눈 감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하시지 않고 “와 보라”고 하셨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절), 여기 ‘거하다’는 단어도 ‘메노’다. 거한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는 것, 하나가 되어야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아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거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이유는 함께 거하며 사랑해야 진리를 알기 때문이다. 단순히 정보나 얻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내 살이 되고 내 몸이 되기 위해 직접 보고,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진리가 능력이 되고 행동이 된다. 그래야 내가 진리가 되고 진리가 내가 된다.
요한은 독특하게 예수님을 “하나님 품속에 거하셨던 분”이라 했다(18절). 품을 아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의 품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참 인상적인 그림이 13장에 나온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23절). 곧 고난이 닥치고 배신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실 때인데 철없이 안겨있는 제자였지만 밀어내지 않으셨다. 남자가 남자의 품속에 기대고 있어서 퀴어신학에서는 이를 동성애 코드로 읽으려 하지만 동성애 코드를 2천 년 전 완고한 유대 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한 마디로 시대착오다. 그런데 요한은 왜 이런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했을까?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보여주고, 진리와 연합한다는 것을 육체적으로 가장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나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함께함이고, 연합이고, 하나됨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당신 안에 거해야 한다고 했다(15:6절). 독립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이라 했다. 진리의 양분을 먹고 생명의 샘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마르지 않고 그 얼굴이 빛이 난다. 사랑하면 왜 얼굴이 예뻐질까? 그렇다면 단순히 교리나 붙잡지 말고, 예수님을 뒷방 손님 취급하지 말고, 함께 거해야 한다. 그 안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진짜 사는 거다.
메시아를 만났다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지켜본 후 그들은 예수님을 따를 분으로 결론지었다. 첫마디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 안드레가 자기 형 시몬에게 가서 한 말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예수님을 따랐다고만 했지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은 안 했는데 요한복음서에서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표현한다.
메시아(הגואל)는 히브리어, 헬라어로는 ‘그리스도’(Χριστός), ‘기름 부음 받은 자’ ‘구원자’라는 의미다. 그들은 ‘구원자’를 정치적인 용어로 사용했다. 구약에서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기름 부어 세웠다. 사울도 다윗도 그랬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꾸 주변국들로부터 침략당하자 그들의 소원은 해방과 독립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가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세워주소서”였고, 하나님의 약속도 “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시온에 세우겠다”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이제 예수님의 이름처럼 되었지만 원래는 구원자라는 보통명사였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불렀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정치적 구원자였고, 다른 하나는 실존적 구원자였다. 이 두 가지 의미는 지금도 필요하다.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압도적인 불의나 압제가 있기 때문이다. 메시아의 도래, 비이성적이고 때로 신비적으로 보일지라도 절박함이 이런 기대를 갖게 하는 것, 인간은 연약해지면 그 희망이 더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메시아 신앙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이기도 하다. 성경은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들을 만들어낸다. 민족 해방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시게 하였고, 제자들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의 희망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그런데 메시아는 실존적으로 더 필요하다. 인생이나 운명이라는 벽 앞에 우리가 너무 왜소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 옳은지조차도 잘 모른다. 원하는 방향으로 살 능력도 없다. 압도적인 불의, 통칭 사망이라 불리는 괴물 앞에 너무 무기력하다. 운명이라는 쳇바퀴에서 우리는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 구원자가 필요하다.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 중에 ‘복권 판매소 풍경’(The Poor and Money)이라는 작품이 있다. 비오는 날 아침, 수많은 사람들이 복권 판매소 앞에 모여 있는데 대부분이 가난한 노파들이다. 가게 앞에 뒷모습만 보인 채 서 있는 모습이 처량하다. 흔히 복권을 사는 그들을 보며 불건전하다느니 요행수만 바란다느니 핀잔을 하기 쉽지만 고달픈 삶의 현실, 도무지 변화될 것 같지 않은 그런 현실에서 복권은 단번에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마법의 수단, 그래서 아무리 확률이 희박해도 그들은 그 복권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의 희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복권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이 우리 눈에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 음식을 사는 데 써야 할 돈, 마지막 남은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샀을지도 모르는 그 복권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고통과 쓸쓸한 노력을 생각해 보렴.”
우리 인생은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메시아가 필요하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구원자가 오셨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시몬을 데려오다
하룻밤을 예수님과 함께 지낸 두 제자는 비전을 품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눈길에 자신들의 눈길을 맞춘다. 그게 비전이다. 예수님이 바라보는 것을 나도 바라보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나도 가는 것. 그래서 안드레가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온다(42절). 성경은 예수님의 눈길이 시몬을 향한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시몬에게서 뭘 보셨을까?
첫째, 예수님은 시몬의 내면을 보셨다. 한낱 어부에 불과한 겉모습이 아니다. 외모나 직업이나 소유나 출신, 학력이 아니라 내면을 보셨다. 내면에 있는 가능성을 보신 것, 다윗을 선택하실 때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셨던 것과 같다.
둘째, 예수님은 스치듯 보신 것이 아니라 주목해 보셨다. 초점을 맞춰 집중적으로, 사랑할 태세로 보셨다. 별로 따뜻한 것 같지 않은 햇볕이지만 돋보기로 초점을 맞추어 모으면 종이가 시커멓게 타들어 가다가 불이 붙고,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계속 떨어지면 시멘트 바닥도 뚫리는데 1장 42절에서 보기 시작해서 마지막 21장까지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계속 보셨다.
셋째, 예수님은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보셨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42절).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가능성을 보는 것, 비록 현재는 비린내나는 어부, 모난 인격의 소유자, 다혈질의 성격, 건질만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시몬에게서 게바(반석 같은 사람)가 될 가능성을 보셨다. 그래서 “장차 게바라 하리라”, 헬라어로 표기할 때 부르는 베드로(Πέτρος)를 ‘게바’(כיפא)라고 부르셨는데 게바는 아람어로 ‘큰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다. 씨 한 톨을 보고 농장이나 과수원을 보셨다고 할까?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신 대로 반석 같은 인생이 된다. 초대교회를 세우고, 2000년 교회사의 든든한 반석 같은 인물이 되었다.
우리를 부르실 때도 마찬가지다. “와 보라”,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랑의 초청, 별 볼 일 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훈련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한 부르심이다. 응답하여 얕은 물가가 아니라 깊은 바다로 힘차게 배를 저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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