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진정한 인격이 드러난다!” 빌 하이벨스가 쓴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Who you are when no one’s looking?)라는 책 속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남들이 지켜보는 앞에선 최대한 멋지고 고상하고 훌륭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게 마련이다.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혼자만 있는 상황에선 별짓을 다하고 산다.
인격이 아주 형편없거나 개망나니 같은 이를 제외하고선 누구나가 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흠 잡힐 언행이나 행동을 피하고, 되도록이면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으려 애를 쓸 것이다. 그렇다. 그만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세상 사람들과 흡사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사는 이들 중 그리스도인들도 아주 많다. 거의 대부분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참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신전 의식’(神前 意識)을 갖고 살아야 한다. 창 39:9절은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란 말이 보이는가? 여기서 ‘하나님께’라는 말의 원어는 ‘rellohim’이라 되어 있다. 이것은 ‘re+elohim’의 합성어로 “하나님을 ‘향하여’(toward God)” 또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라는 의미이다. 그랬다.
혈기방장한 젊은 청년 요셉이 성적인 유혹을 과감히 떨쳐낼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신전 의식’ 때문이었다.
행 4:18절 또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도 ‘하나님 앞에서’란 말이 보이는가? 제사장과 그 문중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도록 경고하자 한 말이 바로 이 내용이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어찌 그들의 말을 듣겠느냐’란 뜻이다.
베드로와 요한 역시 ‘신전 의식’을 가지고 복음 증거의 사명을 감당했음을 잘 보여준다.
성적인 범죄의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고 요셉의 아버지나 집안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한다. 복음증거를 막는 협박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예수님이나 다른 제자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 신앙생활하는 어떤 이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신전 의식을 갖고 멋지게 잘 산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 참된 인격과 신앙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선 잘 믿는 척, 착한 척, 고상한 척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지켜보거나 터치하지 않는 가운데서 어떤 모습으로 사는 가가 그 사람의 진가를 제대로 드러내 주는 척도가 된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매순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까? 출 3:7-8절의 말씀을 참조해보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족속, 아모리족속, 브리스족속, 히위족속, 여부스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애굽에서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반응이다.
“내가 보고... 듣고... 알고... 내려가서... 건져내고... 가나안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다 지켜보고 들으시고 아시고 내려가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보고 듣고 알고’ 행동에 옮기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체적인 움직이심이 보이는가? 여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음을 놓치지 말자.
아무도 보는 이가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은 불꽃 같은 눈동자를 우리를 지켜보고 계심을 꼭 기억하고 우리도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을 깨우치는 말씀들이다.
또 행 7:55-5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복음을 전할 때 성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갈며 그를 대적하려 했다. 결국은 그들로부터 돌로 침을 당해 순교하고 말았다. 그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그들을 저주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는 말을 남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마저 생기는 대목이다. 죽는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며 자기를 죽인 살인자들까지 용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스데반에게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행 7:55-56절에 그 비결이 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을 통해서 하늘뿐 아니라 그의 눈까지 열어주셔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여주셨다.
보통은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막 16:19, 골 3:1, 히 10:12, 벧전 3:22)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선 유독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왜 그리 기록되었을까? 어째서 예수님은 예외적으로 이 장면에서만 서 계셨단 말인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수많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순교하기 직전 상황이 되었으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신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가 유혹에 빠졌을 때도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켜보고 계실 정도로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잘 보여준다. 자기 백성이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빠졌을 때 삼위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다 지켜보고 계심을 성령을 통해 친절하게 눈을 열어 보여주고 계심을 스데반의 사건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연기를 하는 배우다.
배우는 관객이 있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는 관객일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만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유일한 관객이 되심을 늘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처럼 아무도 보지 않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다 지켜보고 계심을 순간순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함을 깨우쳐주는 아침이다. 오늘부터 우리도 그런 자세로 멋지게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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