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학술원(원장 이종윤 목사)이 24일 오후 한국교회100주년 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북한의 기독교-선천을 중심하여’라는 주제로 공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 앞서 진행한 경건회에선 김성봉 목사(한국기독교학술원 이사)의 인도로, 정영숙 권사(사랑의쌀나누기운동위원회 위원장)가 대표기도를 드렸으며 김 목사가 성경봉독을 했다. 이어 김혜정 목사(신성고 교목실장)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디모데후서 4:2)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김 목사는 “현재 섬기고 있는 신성고등학교는 기독교 학교다. 어려운 상황 속에 있지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나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며 복음을 전파해야 할 줄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에 대한 결실을 반드시 맺어주시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세미나에선 박응규 박사(아신대학교)가 ‘북한지역(선천)에서의 기독교-신성학교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박 박사는 “초기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논의하고자 한다면 서북지역의 신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미북장로교의 선교대상이 되기 이전 서북지역은 1862년부터 중국 선교사역을 게시한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파송 선교사들이었던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의 선교적 관심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로스와 맥킨타이어는 1874년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하면서 이후 1879년 백흥준과 이용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 상인들과 함께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했다”며 “서북지역의 교회들은 어느 지역보다도 네비우스 선교방법을 철저하게 적용하며 자전전도와 자력운동 그리고 자주치리의 세 가지 원리로 나아갔다”고 했다.
이어 “선천의 기독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했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기적적인 교회 성장으로 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평북의 선천이 선두에 있었다. 선천의 기독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지 않았다. 1896년 평양에서 기독교에 입교하여 선천으로 돌아온 노효준과 1897년 역시 평양에서 입교한 나병규가 친구 조규환의 도움을 받아 선교에 나서면서부터 복음의 열매가 맺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천의 교인들은 모두 열심히 교회를 섬겼고 교인들 대부분은 중산층과 자연농이었다. 사실, 선천은 한국의 전통과 체제에서 소외 받았던 지역 중 하나였지만 순수한 복음에 입각한 신앙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절대 명제, 곧 항일과 독립이라는 민족의 요구도 요람적인 동시에 민족운동의 터전으로도 그 이름을 떨친 것”이라며 “선천의 교회들을 중심으로 서북 기독교는 초기부터 복음주의적 열정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견인해 나갔다”고 했다.
박 박사는 이어 “신성학교의 설립목적은 민족주의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학문을 배우고 덕을 닦으며 과학과 기술을 연구 연마하여 자유 자강하려는 민족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민족 사회 교육의 지도자를 양성하며 나아가 세계 인류의 평화와 자유와 행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 발굴을 하는 데에 있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성경적 신앙으로 무장된 자립정신과 재정적인 헌신과 후원은 이 지역의 신앙의 영향력이 서북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체에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또한 교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에 출중한 지도자들을 배출하여 어려운 시기에 한국교회와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에 기여했다. 그런 면에서 선천의 기독교와 신성학교가 끼친 영향과 공헌은 역사적 의미가 지대한 선례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김명구 박사(서울 YMCA 월남시민문화연구소 소장)가 ‘선천기독교-구령과 구국의 합치신학’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김 박사는 “1907년 한국교회 일반은 비정치화를 선언했다. 1907년의 전통 아래 있던 대부분의 교회는 영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고, 민족에 대한 문제는 역사 진행자에게 맡겨야 하는 의식이 더욱 공고해졌다. 반면, 민족적이고 사회적 역할을 더욱더 강조한 기독교민족주의자들이 나타났고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통해 민족의 의식을 개조하겠다는 운동들이 등장했다”고 했다.
그는 “YMCA를 비롯한 기독교 사회기관에 속한 인물들과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더 강조했지만, 그들에게서는 구원이나 은총, 성령 등 복음 본연에 대한 지향성은 현저히 약했다. 그러나 선천의 교회들은 개인구원과 한국구원 문제를 별게의 것으로 나누지 않았다”며 “한국교회 특히 서북의 장로교회 일반은 영미복음주의적, 곧 개인구원의 영역, 회심, 은총, 단독자로서의 내면의 신앙을 소중히 여겼지만 민족의 과제와 국가구원을 위한 직접적 개입에 소극적이었다”고 했다.
이어 “선천의 교회는 나라의 과제와 민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서북의 다른 교회들과 같이 성서에 입각한 회심과 개인구원 사역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자각이 출중했지만, 개인구원의 영역과 국가구원의 영역이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라며 “일본의 과장과 조작을 통해서 선천 기독교를 핍박했지만, 서북교회의 확장 속에는 비정치를 거절했던 신학적 구조가 건실히 자리잡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성학교 교장이었던 조지 매큔 교장은 학생들에게 ‘복음’과 ‘애국’을 합치시켰고 그것을 신념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의 제자들은 기독교, 민주주의, 애국 사상, 민족주의‘를 하나의 범주로 인식했다. 복음의 역할을 영적 영역에 그치지 않고 민족운동과 연결시켜 애국계몽운동 조직을 주도하기도 했고, 기독교 민족주의계를 이끌기도 했다. 그는 구령의 바탕 아래 국가구원의 사명을 발휘했다”고 했다.
끝으로 김 박사는 “매큔의 전통은 통합 설립의 주도자였던 한경직과, 강신명, 안광국 등에게도 이어졌고 특히 통합측 설립의 이념이 되었다. 장로교 통합측은 개인구원과 국가구원 영역의 합치를 교회 정체로 삼았다. 선천교회의 유형은 통합측 설립으로 나타난 것으로 선천교회가 통합의 설립 이념과 신학적 원류를 제공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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