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 30:6)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라”(렘 31:33)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1, 4~5)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별함이니라”(고전 2:14)
1. 두 가지 차원의 중생
신학적으로 거듭남을 ‘중생’(重生)이라 말합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인데 한자어로 ‘재생’(再生)이 아니라 왜 무거울 ‘중’을 사용하여 ‘무거운 탄생’이라는 의미로 사용했을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 이 새로운 탄생의 의미가 결코 가벼운 의미가 아니기에 ‘무거울 ’중‘을 우리 선조들이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생각해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카보드‘는 ’매우 무겁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 가를 가르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을 결코 가볍게 여기거나 함부로 다루거나 홀대할 분이 아닙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와 모든 사역을 우리는 매우 무겁게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거듭남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적인 사역이자 추악한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므로 결코 가볍게 다루어선 아니 되는 신비한 출생이라는 점에서 선조들이 ’중생‘으로 번역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한편, 성경에서 중생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개인적인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이고 우주론적인 중생입니다.
먼저 개인적인 구원을 이야기할 때 성경은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요 3:3)고 하였습니다. 이때 ‘거듭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gennethe’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genno라는 단어의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우리말로 ‘태어나다’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위로부터’라는 뜻의 ‘anothen’이라는 단어와 함께 쓰입니다. 요 3:3뿐 아니라 19:11, 23절에서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from above)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요 19:11)
그러므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탄생은 땅으로부터 나는 보통의 출생과는 전혀 다른 하늘로부터의 출생입니다(우리가 육생이 아니라 영생을 상징하는 세례일을 더욱 축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영원한 새 생명을 주입받아 지금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종말론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중생의 개념을 확대합니다. 이사야 65:17에서 새로운 하늘과 땅의 창조를 예언했고, 계 21:1~4에서 이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마태복음 19:28에서는 이 새로운 창조를 ‘팔렝게네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했는데 이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로 번역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중생의 개념을 모든 신자들이 현 시점에서 경험한 초자연적인 어떤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이런 차원에서 중생은 ‘새로움’과 연관됩니다. 이 새로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용되어 ‘물과 성령 세례’와 연결되어 이 세례를 통해 각자 거듭남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노덴’을 ‘위로부터’라 하지 않고 ‘다시’ 혹은 ‘새롭게’로 번역하여 거듭나는 것을 “새롭게 태어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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