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 영적인 믿음을 소유할 수 있을까?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엄마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인가? 그것이 바로 니고데모의 질문이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유대인의 지도자가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선 거듭나야 한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사옵니까”(요3:4)
본능과 이성에 갇혀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물질 세계에 갇혀 영계 불이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5-7)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의 육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의 영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뤄진다. 마치 우리가 바람의 소리는 들어도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전적인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이뤄진다.
그러자 니고데모가 다시 질문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런 일이 나의 영혼 가운데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0-12)
니고데모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땅의 일”에 대한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일어난 우리들의 증언”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일어난 우리들의 증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 관한 증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해 보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와 같은 회당의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아니 그 증언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 대한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니고데모가 아직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다.
우리 가운데에도 혹시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유대인의 회당에 소속은 되어 있었지만, 바리새인의 혈통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적인 교육은 받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도 있을지 모른다.
혹시 우리 가운데 니고데모가 있다면 이 땅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영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은 “이성적인 믿음”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으로 왜군을 물리친 것을 믿기 위해 “영적인 믿음”이 필요한가? “이성적인 믿음”으로 충분하다. 그와 마찬가지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들 가운데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눅1:1-4)
지금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그냥 덮어 놓고 믿으라고 이 글을 쓰고 있는게 아니다.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을 제대로 알라고”,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알라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거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또는 당시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일은 “이성적인 믿음”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관한 일이 “영적인 세계”가 아니라, “물질 세계”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성적인 믿음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이 물질의 옷을 입고 이 물질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영적으로 다 죽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이 “육”인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인간들과 교통하시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 가운데로 인도해 들이시기 위해, “영”이신 하나님이 “육”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물질 세계 안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영적인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성적인 믿음”만으로 예수는 그리스
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이성적인 믿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된 의사 출신 누가와 같은 사람들이 그 모든 일의 근원부터 자세하게 조사한 이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데오빌로와 같은 불신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에 대한 증언을 “이성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 때 우리는 “영적인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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