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재)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동북아시대 도래를 선포한 노무현은 곧 이은 3.1절 기념식에서 "국민통합과 개혁으로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의 ‘임시정부 수립 84주년 기념사’에서 “참여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 위에 서 있다”고 강조하면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의 뜻을 계승할 것’을 천명하여 친일 잔재 청산의 의지를 밝혔다.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였습니다. 오늘의 참여정부는 바로 임시정부의 자랑스러운 법통 위에 서 있습니다. 임시정부가 만들어온 빛나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또 백범 김구 선생님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이곳 기념관에서 임시정부의 수립을 기념하는 행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와 참여정부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선생의 뜻을 계승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께서 못 다 이루신 소망을 이루는 주춧돌을 놓아갈 것입니다.” -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4주년 기념식 연설>(2003.4.13) 중에서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김형석 교수 제공

노무현의 역사인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그해 광복절 경축사이다. 그는 58년 전의 해방과 그로부터 3년 후의 건국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58년 전 오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빼앗겼던 나라와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민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러한 해방과 건국의 역사 위에서,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제58주년 광복절 경축사」(2003.8.15) 중에서

이것은 역대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중에서 1945년 해방과 1948년 건국에 대해 그 시점을 가장 분명하게 규정한 연설이었다. 이 같은 노무현의 역사인식은 임기 마지막 해이던 2007년 광복절에도 "62년 전 오늘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 이날 나라를 건설했다. 오늘 우리가 자유와 독립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연설함으로써, 1948년 건국설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한편 노무현 정부는 정권 초창기부터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을 목표로 내세웠고, 6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국빈 방문하여 아키히토 일왕을 면담하는 등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이어 2004년 7월 21·22일 제주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상대국을 번갈아 방문하는 셔틀외교에 합의했다. 이때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 간에 새로운 합의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 한, 내 임기 동안에는 과거사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거나 쟁점화시키는 것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고 발언하였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과거사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는 국내 여론의 질타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아키히토 일왕과 건배하는 노무현 대통령(2003.6.6) ©김형석 교수 제공

2005년은 한일조약이 체결된 지 40주년이 되는 동시에 '을사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되는 해여서 한일 양국은 역사문제로 다시 충돌했다.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이 삭제되고,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자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게다가 '역사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악화된 한일 간의 충돌은 민간 교류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수상은 2005년 6월 서울에서 개최된 정상회담에서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설치하여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일본과의 역사문제는 국내적으로도 큰 난제였다. 2004년 3월 22일 국회에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자, 그해 8월 15일 노무현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과거사 희생자들에 관한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는 애국선열에 대한 존경만큼이나 얼굴을 들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광복 예순 돌을 앞둔 지금도 친일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고, 역사의 진실마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반민족 친일행위만이 진상규명의 대상은 아닙니다. 과거 국가 권력이 저지른 인권 침해와 불법행위도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을 규명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사안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국회 안에 만들 것을 제안 드립니다." - 노무현 대통령 <제59주년 광복절 경축사>(2004.8.15) 중에서

이에 따라 2005년 5월 31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가 설립되고, 초대 위원장은 진보 성향의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가 선정되었다. 동 위원회는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를 25권의 책으로 발간하면서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공표했다. 이와 동시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도 2009년 11월 거의 동시에 발간되었다. 2001년부터 독자적인 편찬 작업을 벌인 성과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와 거의 일치한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김형석 교수 제공

친일인명사전은 1904년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의 일제 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4,389명의 친일 행각과 광복 이후의 행적 등을 담았는데, 기존의 사회 통념을 파괴한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안익태·홍난파, 언론인 장지연, 소설가 김동인 등 유력 인사들과 독립유공자 20여명이 포함되어 논란이 일었다.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친일 청산작업에 앞장 선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친일 시비로 곤욕을 치루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친일파 청산 논쟁이 한창이던 2004년 8월 열린우리당 의장 신기남은 부친 신상묵(창씨명: 시게미쓰 구니오로)이 일본군 헌병 오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 의장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어 10월에는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의 증손녀라던 김희선 의원의 말이 허위일 뿐 아니라, 오히려 친부가 만주국 특무경찰 김일련(창씨명: 가네야마 에이이치로)이란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이밖에 이미경 의원의 부친 이봉건이 일본군 헌병 출신이며, 홍영표 의원의 조부 홍종철(洪海鍾轍, 코우카이 쇼와다치)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 개정안>을 발표하는 김희선 의원(앞열 좌 2) ©김형석 교수 제공

한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5년 12월 1일 설립되었고, 초대 위원장 송기인 신부에 이어 진보성향의 역사학자 안병욱 교수가 2대 위원장을 맡았다. 동 위원회가 다룬 '과거사'의 범위는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서 권위주의 통치까지인데 1년간 피해자 신청을 받고 이후 3년간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11,175건의 신청을 받아서 그중에 8450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 528건은 진실규명 불능, 1729건은 각하 처리했다.

이 같은 노무현 정부의 진상규명 활동은 대상이 일제강점기 지도층 인사는 물론 해방 이후 국가 공권력에 희생당한 민중계층까지 망라했다는 점에서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를 뛰어넘는 거대한 역사전쟁이었다. 그뿐 아니라, 친일인명사전을 통한 친일 청산작업은 기존의 역사인식을 부정하는 가치관의 반전을 가져다주었다. 결과 1948년 '정부 수립'(건국)에 중심 역할을 한 상당수 인사들이 친일파로 매도당하였다.

2008년 당시 역사학계와 시민사회를 연결하던 <한국사 시민강좌>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으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에서 정치·외교·군사·법률·경제·학술 등의 각 분야에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했다. 그런데 이 명단에 선정된 인사들 중 김성수(1891-1955), 윤치영(1898-1996), 이병도(1896-1989), 백낙준(1895-1985), 현제명(1902-1960), 김활란(1899-1970), 이응준(1890-1985) 등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다. 이것은 기존 역사학계의 인식을 부정하는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2004년 7월 제주에서 정상회담 중에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형석 교수 제공

한편 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정리는 한일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2005년 8월 서울행정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40년간 비공개이던 한일협정 문서의 공개를 결정하자, 문서 공개가 야기할 피해 보상 문제 등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를 구성했다. 민관 공동위는 "한일청구권협정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이전 정부들이 일관되게 견지해오던 우리 정부의 직접 지원 방침을 배제하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동해 해저 지명 문제를 놓고 벌어진 한일 간의 갈등이 배타적 경제수역과 독도 문제로 비화되자 2006년 4월 노무현은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전면적인 강경 대응방침을 밝혔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의한 점령지 권리, 나아가서는 과거 식민지 영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또 과거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과 학살, 40년간에 걸친 수탈과 고문, 투옥, 강제징용, 심지어 위안부까지 동원했던 그 범죄의 역사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이제 정부는 독도 문제에 대한 대응방침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 어떤 비용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노무현 대통령 「한·일관계에 대한 특별 담화문」(2006.4.25) 중에서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하면서도 막상 일본 정부에 대해서는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2006년 7월 위안부 피해자들이 헌법재판소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위헌소송을 제기하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는 위안부 배상 권리만 만들어주고 실제로는 직무를 방기한 '과거사 정치'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북한 방문을 위해 군사분게선을 넘는 노무현 대통령(2007.10.2) ©김형석 교수 제공

노무현은 대선 후보 시절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 나머지는 대강해도 괜찮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친북주의자 또는 반미주의자라는 용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서 행한 각종 연설문에 나타난 역사인식을 살펴보면 특별히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은 정치행적과는 별개 문제이다. 재임 기간의 외교 행적에서도 한일 간에 식민지 지배나 위안부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등에서 확실하게 해결한 것이 없고, 한중 외교에서도 동북공정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에 한미관계에서는 이라크 파병, 한미FTA, 제주 해군기지 등 중요한 외교·안보 사안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노무현을 두고 보수진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비교하여 그의 합리성을 높히 평가하고, 진보진영에서는 미국 의존도가 높은 정치상황에서의 한계성을 지적한다.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③ 노무현의 친일·과거사 전쟁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러나 노무현은 그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국민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권하고 싶었다. 의욕이 지나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과감한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한미FTA 추진의 취지를 밝혔다. 또 "나는 우리 국민의 역량을 믿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다 이루어낸 우리 현대사를 볼 때 국민들이 한미 FTA에 내포된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당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한미FTA를 추진하기로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노무현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일평생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이상주의자에 머무르지 않고, 중요한 순간 마다 재빠르게 현실에 적응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필자는 이것이 현실주의자 노무현의 역사인식이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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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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