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민중신학의 첫 번째 전거인 성서
서남동은 성서를 자신이 주창하는 민중신학의 첫 번째 전거典據로 삼는다. “나는 성서를 전거(point of reference)로 봅니다. 이것을 풀어 말한다면 ‘참고서’라는 겁니다.” 그에게는 성서 뿐 아니라, 교회사와 사회문화경제의 전개 과정도 민중신학의 전거, 즉 참고서이다. 그는 성서(성경)를 이렇게 본다.
구약성서에 있어서 율법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끝나고, 신약성서에 있어서 신학이 생기면서 이야기는 가려져버리고, 종국에는 이야기가 믿음으로, 교리로, 신학으로 바뀌어졌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이야기는 교회의 신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뀌어졌고, 예수의 죽임(살해, murder)은 역사적 교회에서 예수의 죽음(death)으로 대치되었고 예수의 십자가형(정치적이고 형법상의 형 집행)은 예수의 십자가(종교적 상징)로 바뀌어졌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죽음)를 되찾으려면 적어도 방법론적으로 신학(그리스도론, 구원론, 예정론 등)이 유보(moratorium)되어야 할 것이다.“
서남동에게 성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민중신학을 위한 참고서에 불과하다. 그가 이해하는 성령론도 전통신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느냐를 결단하려고 할 때 거기에는 하나의 참고서가 요청되는데, 성서의 본문을 이러한 참고서로 해석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성령론적 해석’이라고 한다. 성령을 전혀 엉뚱하게 끌어다 붙인 것이다. 그는 민중을 위한 계약법전을 모세오경의 율례보다 문서주의의 시각으로 접근한다. 그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언어와 혈연이 같은 것이 아닌, 단지 하나의 계약으로 맺은 12부족연맹으로 본다. 그에게 성서는 단지 전래되어 온 여러 이야기를 편집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출애굽 사건 이전의 내용은 모두 신화와 전설로 치부한다. 따라서 그는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란 용어 대신 구지 ‘성서’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노예들의 반란사건을 믿는 것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노예들의 반란의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서남동은 성서의 전거로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의 두 가지를 든다. 그는 신학을 하는 방법에 있어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철학, 19세기 개신교 자유주의는 칸트의 이성비판 철학, 최근의 실존주의 신학은 실존주의 철학을 각각 전거로 삼았다면, 이제 정치신학(혁명・해방・민중의 주체들의 총괄적 명칭)이 사회경제사 내지 문화사회학의 사회적 조건이 그 전거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그는 출애굽 사건과 십자가 사건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그에게 있어서 모세는 해방자이며, 출애굽 사건은 “노예해방의 사회경제적 사건”이다. 예수는 “저항자인 동행자”이고, “예언자들은 민중의 대변자들”이다. 출애굽 사건은 노예제 사회에서 억눌린 “노예들이 견디다 못해 같이 단결해 싸워서 우물에다 독약을 타고, 장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한밤중에 탈출한 것이 기원전 1290년에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그는 십자가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의 경우는 일회적 혁명인 데 반해서 십자가 사건의 경우는 영구적 혁명을 겨냥한 듯하다. 일회적 혁명의 경우에는 민중이 구원의 대상이 되고(타력적 구원), 영구적 혁명의 경우에는 민중은 구원의 주체가 된다(자력적 구원). 모세는 민중의 소리(갈망)에 응답한 자였지만, 예수 그 자신이 민중의 소리(갈망)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민중적이었고(민중을 위한 자가 아니라) 바로 민중의 인격화, 민중의 상징이다.
그는 일본의 신학자 다가와(田川建三)의 주장을 받아들여 “민중신학의 주제는 예수라기보다도 민중”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중신학은 예수가 민중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지, 민중이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하나님을 인간 밑에다 둔 셈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인간은 구원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다. 성경에서 백성, 군중, 무리, 민중은 언제나 어리석은 죄인들에 불과하며, 무리의 단체행동을 칭송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서남동은 자신의 정치신학의 전거로 삼은 십자가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예수의 ‘십자가형’(crucifixion)은 종교적 상징인 ‘십자가’(cross)로 승화되고, 정치적인 함의(含意)가 있는 메시아 영상은 종교적인 함의로 변질된 그리스도 영상으로 승화되었는데, 이렇게 승화됨으로써 그 구속사건은 역사적인 핵을 상실하고 말았다. … 민중신학의 전거는 역사적 사실로서 정치의 영역에서 발생한 예수의 ‘십자가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핵을 다시 찾는 방법은 사회경제사적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을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그것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허탄한 일을 한 것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육하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민중은 하나님을 뛰어넘는 위대한 존재인가? 그 민중은 누가 지으신 것이란 말인가? (계속)
최철호 목사(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한교연 다음세대를위한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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