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에 ‘차별금지법’ 비상등이 다시 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가 인권선진국이 되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라면서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에 대한 의지를 재차 피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2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차별금지법’을 “꼭 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10월 말경에도 비공개 참모 회의에서 “차별금지법을 검토해볼 때가 된 것 같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있었다. 이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성소수자, 동성애 등 진보적 가치와 직결된 인권 이슈에 관심이 각별한 문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해결하고 싶은 과제로 차별금지법을 언급한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문 대통령의 이런 소신이 단순히 개인적인 희망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임기 내에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일종의 좌표 설정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의 거듭된 메시지가 여권과 열성 지지자들에게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총공격’ 명령으로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독교계의 반대와 여당의 입법 폭주로 형성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서두르지 않았지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눈치 보지 않고 본인의 소신대로 마지막 승부를 걸겠다는 계산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교계는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금지(평등)법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면서도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상태로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직 사회적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고 신중하게 예의 주시하는 모습이다. 거기에는 이제 6개월도 안 남은 정부가 지난해 말처럼 설마 또 다시 무리한 입법 폭주에 나서겠느냐 하는 일부 기대감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들이 ‘차별금지법’이라는 이슈에는 비교적 민감하게 대응하면서도 아직은 유보 또는 반대 견해를 밝히는 등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는 점도 교계가 당장 불이 발등에 떨어진 것처럼 대응할 필요를 못 느끼게 하는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8일 한교총 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은) 당면한 현안이거나 긴급한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앞으로 가야 하는 방향을 정하는 지침 같은 것”이라며 “충분한 논의를 통해 국민적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해 법 제정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에 더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25일 서울대에서 열린 국민의힘 서울캠퍼스 총회에서 “평등을 지향하고 차별을 막겠다고 하는 이 차별금지법도 저것이 개별 사안마다 합리적으로 자유와 평등이라는 것이 신중하게 형량이 안 되고 일률적으로 가다보면 그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문제가 많이 생긴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대선 주자들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의견 표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대선 정국에서 가급적 예민한 사안에 대한 충돌을 피하려는 의도일 뿐 언제든 말과 행동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정치인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지난 2012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다 2017년 대선에서는 “동성애나 동성혼을 위해 추가적인 입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이미 법제화 돼 있다”는 식으로 말이 바뀌었다. 그러더니 취임후 잠잠하다 임기를 6개월 남긴 시점에서 2012년 대선 때 내세웠던 공약 시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100일 남긴 시점에서 본인 스스로 “남은 임기가 짧지 않다”고 언급한 것도 분명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임기 말에 이런저런 문제들로 소위 ‘레임덕’에 시달리며 심지어 탈당까지 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으나 문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임기 초와 비교해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기는 했어도 남은 임기 내에 무언가 이루겠다는 의지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계가 반대하는 차별금지법에 불교계가 찬성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니다. 조계종은 지난 24일 성명에서 “차별금지법이 14년째 제정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문재인 대통령도 차별금지법 검토를 촉구하고 있다. 국회는 차별과 혐오가 없는 세상을 바라는 국민의 뜻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대통령의 의지를 거들고 나섰다.

‘차별금지법’은 성별·인종·종교·장애·성 정체성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 입법으로 처음 발의된 후 14년간 발의와 폐기를 반복했다. 현 21대 국회에는 정의당 장혜영 의원, 더불어민주당 이상민·박주민·권인숙 의원이 총 4건의 차별금지(평등)법을 대표발의한 상태이나 여당이 당론으로 정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시도는 아직까지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문 대통령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거듭된 발언이 정치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교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진평연’ 등 교계 단체들이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차별금지법 검토라는 잘못된 ‘신호’를 즉각 철회하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단순히 자신이 생각하는 진보적 가치를 구현해 보고 싶은 의중을 표현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현 시점에서 정치권과 지지자들을 향해 행동에 나서라는 사인을 보낸 것이라면 그건 다르다. 진보진영이 내세워온 가치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국민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는지를 생각한다면 지금 대통령은 자신의 소신보다 국민의 안위를 더 세심히 살펴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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