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의 논문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연재합니다. 2022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입니다.

들어가는 말: 중화질서의 붕괴와 서구문명의 등장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조선왕조는 명나라 중심의 중화질서에 편입하여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조선은 중국을 事大하고, 중화질서에 있는 다른 나라와 交隣하며 유지해 왔다. 이런 조선사회는 19세기 중엽이후 매우 중요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기존의 중화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질서였다. 그것은 기독교를 중심으로하는 서양의 만국공법질서였다. 한국 근현대사는 바로 중화질서에 속해있던 조선이 서양질서를 수용하여 발전하는 과정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국제질서에 속해 있다.

중화중심의 국제질서에 도전한 서양세력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선 러시아를 들 수 있다. 러시아는 일찍이 서진을 계속하여 아시아에 진출하였고, 결국 1698년 중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북쪽에서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에 균열을 가져왔다. 이어서 1840년대 영국을 중심으로하는 유럽의 세력이 인도양을 거쳐서 중국에 진출하였고, 결국 이들은 남쪽에서 중화질서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태평양을 넘어서 서진정책을 감행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미국은 서양제국과 중국사이에서 때로는 서양국가와 때로는 중국과 협력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갔다. 이어서 중화질서의 변두리에 있던 일본이 서양을 본받아 1870년대 초에는 중국과 대등한 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동양의 내부에서 중화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만 유일하게 중화질서를 신봉하고 있었다.

중국이 새로 들어오는 서양질서를 놓고 진통을 겪고 있었지만 조선은 아직 문을 열고 있지 않았다. 조선은 1876년 서양의 형식을 따른 강화도조약을 맺었지만 이것은 서양질서를 수용했다기 보다는 과거의 동양질서 안에서 조약을 맺은 것이다. 따라서 1882년에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이하 조미조약)은 조선이 최초로 서양문명을 받아들여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조미조약 이후 곧 바로 영국, 독일과 조약을 맺었고, 이어서 러시아,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1882년에 맺어진 조미조약은 조선이 세계각국과 조약을 맺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미조약을 통해서 들어온 미국문명은 서양문명의 일부분이면서도 다른 서양문명과는 다른 측면을 갖고 있는 독특한 문명이다. 이 미국문명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이 되었고, 미국문명을 받아들인 조선도 세계문명과 교류하는 나라가 되었다.

필자는 1882년의 조미조약은 조선이 서양의 국제질서에 편입하는 최초의 조약이며, 이것을 중심으로 한민족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와 일본의 새로운 근대질서, 그리고 러시아의 질서를 견제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중심으로하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조미조약으로 시작되는 미국적 질서를 수용한 것이다.

I.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역사적인 배경과 그 내용

1. 제너럴 셔만호 사건과 조미관계

19세기 중엽부터 종종 미국의 포경선이 조선해안까지 진출했으나 한미관계의 출발이 된 사건은 1866년 제너럴 셔만호 침몰과 미국인 실종사건이다. 1886년 여름 한 영국 선박회사가 미국선적의 제너럴 셔만호를 임차해서 조선에 오게 되었다. 이 배에는 미국인 선주 프레스톤(Preston), 선장 페이지(Page)과 그의 동료 윌슨(Wilson)과 영국인 화물관리인 호가쓰(Hogarth)와 토마스(Thomas)가 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천주교박해(병인박해)로 인해서 프랑스와 극도의 긴장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맺고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 배에는 영국선교사 토마스가 탑승하고 있었는데, 그는 조선에 개신교선교를 시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완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제너럴 셔만호는 침몰하고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은 살해당했다. 여기에는 미국인과 영국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제너럴 셔만호의 침몰은 조미관계의 출발이 되었다. 제너럴 셔만호의 침몰 직후 조선을 다녀온 리델신부에 의하면 배에서 사망한 사람은 20명이었다. 그런데 영국회사가 지푸 총영사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제너럴 셔만호에는 25명이 타고 있었고, 수로안내원으로 제너럴 셔만호에 탔던 중국인 우문태에 의하면 27명이 승선했다고 하고 있다. 만일 이런 보고가 사실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에서 제너럴 셔만호 승객 가운데 생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미국의 조선과의 관계는 이런 생존 가능성에 근거해서 조선에 이런 문제를 알고자 하는 외교적인 노력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1887년 1월 미국은 아시아함대 소속의 와츄세트(Wachusett)호와 슈펠트(R. W. Shufelt) 사령관을 조선에 보냈다. 와츄세트호는 황해도 장연에 도착하였고, 여기에서 김자평이라는 상인을 만났다. 이 사람은 원래 천주교인으로서 중국과 밀무역을 하고 있었고, 우문태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은 1885년 토마스가 1차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 토마스를 안내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김자평은 자신이 평양에서 직접 서양인 2명과 중국인 2명이 살아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와츄세트호는 조선의 비협조로 더 이상 자세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미국은 1888년 4월에 다시금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조선에 군함 셰난도어(Shenandoah)의 부함장 페비거(F. C. Febiger)를 파송하였다. 미국은 김자평의 증언이 사실인지를 알고자 하였고, 조선은 이것을 부인하였다. 결국 조선은 김자평을 체포하여 자신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페비거 앞에서 대질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그런 조건에서 이루어진 증언은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별도로 질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것을 거부하고, 페비거가 볼 수 있는 장소에서 김자평을 참수하여 효수하였다. 그 이유는 김자평이 거짓말을 하여 조선을 혼란시키며, 미국 배를 조선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사실 이 당시에 죽은 것은 김자평이 아니라 조선정부가 다른 사람을 김자평이라고 귀집어 씌워서 죽인 것이다.

1871년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중미국공사 로우(F. F. Low)를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를 파견하여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미국은 문제의 초점을 제너럴 셔만호의 선원문제 보다는 이 문제로 야기된 문제, 즉 조선해협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상호조약을 맺으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한 다음에 이 문제를 조선에 촉구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이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과거의 입장을 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과 조선 사이에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조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이상 조선을 공격하지 않고 물러났으며, 조선은 여전히 서양에 개방하지 않았다.

그 후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미국과 조선의 조약은 처음 조선을 방문한 슈펠트에 의해서 다시 시작되었다. 슈펠트는 1880년 초에 다시금 조선에 와서 과거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조선측의 설명으로 오해가 풀렸고, 만일에 이런 설명이 일찍 이루어 졌다면 신미양요와 같은 대단한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으로서 제너럴 셔만호의 침몰로 인한 조미관계의 걸림돌은 제거된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는 여전히 제너럴 셔만호 침몰의 진실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현재 남겨진 기록은 조선측 관변 기록 뿐이며, 이런 기록들은 미국의 공격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입장에서 쓰여졌다. 아울러서 미국도 이런 과거에 얽매이기 보다는 조선과의 수교를 이룩하기 위해서 이것을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제너럴 셔만호 사건은 미국과 조선 사이에 서로 만나는 접촉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제너럴 셔만호 사건은 조미관계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계속)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