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을 최초 한글로 번역한 이가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을 우리 말로 최초 번역한 이는 누굴까? 바로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한국명 피득) 선교사다.
그러나 ‘피터스’는 ‘존 로스’ 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 읽을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선교사의 이름이 잊혀진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신학자인 박준서 박사(전 경인여대 총장)가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그를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열매 중 하나로 최근 피터스 선교사의 전기(傳記)와 그가 생전 최초로 번역했던 ‘시편촬요’(영인본)를 대한기독교서회를 통해 펴냈다. 박 박사는 이 두 책이 우리나라에 피터스 선교사를 알리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란다. 아래는 이 책들과 피터스 선교사에 대한 박 박사의 설명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요약·정리한 것이다.
Q. 피터스 선교사(목사)는 누구입니까?
A. “피터스 선교사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1898년 ‘시편촬요’)했고, 그 후 구약성경 ‘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선임돼 1937년 ‘개역구약성경’을 완성한 분입니다. 즉 구약성경 한글 번역을 시작했고 마무리 지은 인물인 것이죠. 한 마디로 한국 사람들이 한글로 구약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해주신 공로자이십니다.”
Q.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A. “몇 년 전, 미국 LA 근교 패서디나(Pasadena)에 있는 풀러신학교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패서디나는 피터스 선교사가 70세에 은퇴한 후 미국으로 가서 말년을 보내신 곳입니다. 평생 구약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피터스 선교사 묘소에 가서 참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지역의 목사님들께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제게 이렇게 질문을 하더군요. ‘피터스 목사가 누구입니까?’
몇 달 동안 수소문하고 컴퓨터 작업을 한 결과, 어렵사리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를 찾아냈습니다. 작은 묘비도 없이 잡초로 뒤덮혀 방치되어 있는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를 보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묘소를 찾은 후, 한인 목사님 모임에서 피터스 선교사 묘소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한 목사님이 ‘그렇게 중요한 인물에 관해서 왜 교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계와 사회에 피터스 선교사의 공적을 알리는 것이 교수로서 나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이것이 2018년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Q. 피터스 선교사의 출생 배경과 그가 한국까지 오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피터스 선교사는 1871년 제정 러시아(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이삭 프룸킨(Isaac Frumkin)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유대교 회당에서 히브리어를 배웠고, 시편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암송하며 자라났습니다. 어학에 특출한 재주가 있었던 그는 히브리어에 통달했습니다.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차별과 박해가 심해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삭 프룸킨이 23살이 되었을 때, 그도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을 떠났습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향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발길을 동쪽으로 돌렸습니다. 일거리를 찾아 이집트, 인도, 싱가포르를 전전하다 일본까지 가게 됩니다. 일본 나가사키에서 그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정통파 유대인이 교회를 찾아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었다고 믿는습니다. 당시 그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지만, 독일어는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습니다. 그가 찾아간 교회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목회하는 교회였습니다. 그 선교사는 미국인이었지만 마침 독일어에 유창한 목사였고, 그를 찾아온 유대인 청년에게 독일어로 기독교에 대해서 2주 동안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교사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이삭 프룸킨은 크리스천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선교사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 그는 새 사람이 된 징표로서 그에게 기독교를 가르쳐 주고 세례를 준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라고 개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피터스가 된 것입니다.
유대인 청년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는다는 소식을 미국성서공회 일본 책임자가 되는 헨리 루미스 목사가 듣고, 동경으로부터 나가사키로 먼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는 피터스 청년의 세례식에 참석하고, 그에게 한국에 나가 권서로 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피터스 청년은 한국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루미스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895년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피터스 청년이 한국까지 오게 된 일련의 사건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히브리어에 능통한 피터스 청년을 택하시고, 섭리의 손길로 그를 한국까지 이끄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Q. 이번에 피터스 선교사 전기와 함께 영인본으로 나온 ’시편촬요’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권서로 한국에 온 피터스 청년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신약성경 쪽복음을 파는 일을 했습니다. 언어에 천부적 재능을 가졌던 그는 한국에 온 지 2년이 지나자 한국어에 완전히 능통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구약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권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그가 히브리어로 애송하던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순 두 편의 시편을 번역했을 때 한시라도 빨리 한국 사람에게 구약성경을 읽히겠다는 일념으로 ‘시편촬요’를 출판했습니다. 이때가 1898년이었습니다. ‘시편촬요’는 한국 역사상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구약성경입니다. 이로서 우리 민족은 처음으로 구약의 말씀을 우리말로 읽게 된 것입니다. ‘시편촬요’가 출간되었을 때 곧 매진됐고, 2천부를 추가 인쇄했지만, 그것도 곧 매진됐습니다. 당시 한국의 초대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갈급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촬요’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라는 것 외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이 더 있습니다. 우선 피터스 청년이 능숙한 히브리어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했다는 점입니다. 영어나 중국어에서 중역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번역했고,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기 전, 띄어쓰기를 한 것입니다. 피터스 청년이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구약 책 중에 번역하기 가장 난해한 시편을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Q. 책에는 ‘시편촬요’ 뿐만 아니라 ‘찬셩시’라는 것도 실려 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A. “피터스 선교사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동시에 찬송가 가사도 작사했습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시편은 읽는 책이 아니라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유대인 출신인 그는 그가 번역한 시편을 주제로 17편의 찬송가 가사를 작사했고, 이들은 ‘시편촬요’와 같은 해에 출간된 초기 찬송가 ‘찬셩시’에 수록되었습니다(1898년). 오늘날 한국교회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은 피터스 선교사가 작사한 것입니다.”
Q. 피터스 선교사가 1937년 완성한 ‘개역구약성경’은 무엇인가요?
A. “피터스 선교사는 미국 맥코믹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선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한국으로 와서, 황해도 재령, 평북 선천에서 선교 사역을 했습니다. 1926년 구약개역위원회의 평생위원으로 위촉을 받고, 통달한 히브리어를 활용해 11년간 구약개역 작업에 헌신했습니다. 병 치료를 위해 1년간 미국에서 지낸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10년간 구약개역 작업에 몰두한 것입니다. 1937년 개역 작업이 완료되었고, 한국성서위원회는 피터스 선교사가 완성한 개역구약성경을 한국교회의 공인된 ‘개역구약성경’으로 공식 선언했습니다. 그 후 개역구약성경은 새 맞춤법에 따라 고치고 ‘가라사대’와 같은 고어체 문장의 수정을 고쳐 오늘날도 한국교회에서 공인된 구약성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역구약성경이 완성되기까지 한국교회에선 하나님의 호칭, 즉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개역구약성경에서 피터스 선교사는 ‘하나님’으로 했고, 그 후 개신교에서는 호칭이 ‘하나님’으로 확정됐습니다.
아울러 개역구약성경을 완성함에 있어 피터스 선교사를 도운, 연동교회 장로였던 이원모 장로의 공헌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Q. 피터스 선교사의 ‘한센병자 마을 봉사활동’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피터스 선교사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애양원의 전신인 ‘비더울프 한센병자 주거 단지’를 위한 봉사활동입니다. 피터스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 거주 지역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시간이 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서 설교하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로해주었습니다. 또한 선교사의 박봉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한센병 환자와 가족을 위한 40채의 주택을 건설하도록 후원금으로 지원했습니다.”
Q. 끝으로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의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A. “2018년 12월 피터스 선교사의 묘소가 있는 묘원 추모관에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을 설치했습니다. 그 후 매주 아름다운 꽃으로 목사님 묘소에 ‘꽃봉헌’을 해오고 있습니다.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많은 자료를 미국장로교 문서보관소로부터 입수했고, 후손들의 소재도 모두 파악했습니다. 이번에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피터스 선교사에 관한 최초의 전기를 비롯해, ‘시편촬요’와 ‘찬셩시’ 영인본을 출간했습니다.
앞으로 서울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피터스 목사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피터스 선교사 설교집(219편에 이르는 설교 육필 원고) 출간, 피터스 선교사 관련 자료 수집 및 출판, 피터스 선교사 기념 강좌 개최, 피터스 선교사 영상물 제작, 피터스 선교사 자료 전시실 및 기념관 건립 등도 추진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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