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가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던 요인을 크게 세가지로 서술할 수 있다. 첫째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종교개혁 직전에 구텐베르크 금속 활판 인쇄술이 발명(1440 년 경)되어 인쇄를 통해 정보를 빠르게 전달 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이다. 이 일을 통해 당시 크리스천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눈을 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음악이었다. 자유로운 음악을 사용하여 회중들에게 빠른 시간 안에 개혁의 당위성을 알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개혁의 불을 삽시간에 널리 퍼트리게 하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마틴 루터는 음악의 효용성을 이해하고 있었던 개혁자로,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이전에 개혁자들이 이루지 못한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루게 한 것이다.
이에 필자는 마틴 루터를 신학자가 아닌 음악인으로서 조명해 보기 위해 그의 음악교육 과정과 예배음악관을 서술하고 이것으로 정립된 그의 교회음악 철학이 종교개혁과 개신교, 교회음악에 어떠한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 또한 서양 음악사에 미치게 된 영향을 탐구하려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통해 오늘날 예배음악을 점검하고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루터는 독일 작센안할트 주 아이슬레벤(Eisleben) 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 와 어머니 마가렛 지글러( Margarether Ziegler)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마가렛 지글러는 당시 수준 있는 가문의 딸로 음악적 소양이 깊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루터는 자연스럽게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그가 쓴 "Urban Regius 1535" 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짧은 소가곡을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의 음악교육 과정을 보면 그는 비록 전문 음악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그의 모든 교육과정 속에 우선순위는 음악을 많이 생각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루터의 교육 과정 속에 음악교육을 요약 서술해 보도록 한다. 루터는 라틴 학교인 멘스필드 초등학교(Mansfeld School) 를 다녔다. 이때 그의 교육은 주로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이 주 교과 과목이었는데 그는 이 학교에서 노래하는 것을 생활화 하는 첫 음악교육의 장소였다. 이어 라틴 성당 학교(Latin Cathedral School) 에서 공동 생활을 하며 챤트(Individual Chant) 를 노래하는 훈련을 많이 쌓게 되었다.
어어 조지엔 학교(Georgen School) 에서 당시 프란체스코 영성을 지닌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귀족 가문인 The Schalbe 와 Cotta 집안과 친분을 쌓아가며 루트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이 때, Cotta 집안 여사가 루터의 노래와 루트 악기를 연주하는 실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18세에 당시 독일에서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에르푸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을 입학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의 전공은 문학사였지만 음악 이론과 작곡을 부전공으로 공부하였고, 아울러 후에 루터교회 찬송 작곡가가 된 요하네스 바인멘(Johannes Weinmann1477-1542), 작곡가 그로그 라우(Grorg Rhau 1488-1548), 찬송 작가 져스투스 요나Justus Jonas(1493-1555)또 한 명의 유명한 작곡가 요하네스 슈팡엔 베르그(Johannes Spangengberg 1484-1550) 등과 친분을 쌓게 되어 그가 미래에 자신의 사역을 돕는 음악 동역자들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대학교육을 마치고 법학을 하려던 원래 계획을 접고 수도사로서 수학 받기 위해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문하여 그동안 쌓아왔던 음악적 소양을 체계화 하고 전문화 하여 자신의 사역 속에 음악을 접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전개과정을 보면95개 조항: 원제목 "면죄부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Disputation on the Power and Efficacy of Indulgences)" 을 작성하여 당시 여러 학자들이나 이에 관계된 관련자들과 함께 토론을 벌이자는 의도로 1517 년 10월 31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이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퍼트리려는 의도도 없었고, 교황에 대한 공격 또한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2주도 채 안되어 삽시간에 유럽 전역에 이 조항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루터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발생 되었던 것이다. 이후 지속되는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자 드디어 1520년 9월 21일 로마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발표하게 된다. 그러자 그 해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서 루터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파문서를 불태워 버린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루터는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되어 피난의 생활이 이어지게 되었고 1521년 발트부르크(Wartburg) 성에 피신하면서 그 곳에서 여러 글을 쓰게 되었고 특히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루터의 음악이 개혁의 불을 지피는데 사용되기 시작한다. 1523년 벨지움에 있는 앤트워프 수도원(Monastery Antwerp in Belgium)의 수도사 하인리히 뵈즈 (Heinrich Voes)와 요한 에쉬(Johann Esch) 가 화형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루터란 최초의 순교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혁에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터가 쓴 최초의 찬송인 "Ein Neues Lied Wir heben an (a new song we are raising) 새로운 찬양이 시작되고 있다"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음악을 사용하여 개혁에 불을 크게 지피는 역할의 시작이 되었고, 로마 교황청의 타락을 음악을 통해 저항하며 온 유럽 사람들에게 알리고, 순교자들을 추모하며 모든 개혁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간구하는 의미를 담은 찬양의 시작이 된 것이다.
루터는 중세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에서 회중들이 찬양을 부르지 못하게 한 오류를 바로 잡으려고 예배에서 회중들의 입을 열어 찬양할 수 있는 찬송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1524년 요한 발터(Johann Walter) 의 도움으로 23곡의 비텐베르크 성가집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개신교 역사에 있어 가장 최초로 만들어진 찬송집이다. 이어 같은 해에 8편의 찬송집(Etlich Christlich Lieder)을 만들었고 1529년 영적 찬송가(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 1533 년 1545 년에 각각 영가집(Geistliche Lieder)을 만들게 되었다.
이어 독일의 회중 찬송인 코랄(Choral) 쟝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안에 우리가 종교개혁가라고 불리어 지고 있는 대표적인 찬송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ist unser Gott so") 가 담겨있다. 이 곡은 당시 독일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세속 멜로디를 사용하였고 가사는 시편 46편 1-2절을 기초로 해서 만들게 되었다. 이 곡을 만들게 된 몇 가지 이론들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정설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역자인 레온하드 카이져(Leonhard Kaiser) 의 순교를 추모하며 결백성과 정당성을 많은사람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기록 되고 있다.
루터의 음악적 특징을 몇 가지로 볼 수 있는데 그는 한 음표에 한 음절씩 가사를 붙였다(Syllabic). 리듬의 생동력(rhythmic vitality)을 가하게 하였다. 라틴 찬송이나 챤트( Latin Hymns and Chants), 대중적 세속 노래들(Popular secular songs) 그리고 새롭게 작곡해서(New composition) 다양한 자료들을 합창(Chorale)에 접목시켜 대중들에게 친숙한 음악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또한 기악음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중세 미사음악을 전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에 맞도록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교회에 대입시키게 되었다. 가사는 시편가 만을 주창하지 않았고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그 당시의 언어로 바꾸는 페러프레이즈(Parephrase) 방법을 사용하여 회중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며 깊이 동감할 수 있는 가사를 사용하게 되었다.
루터가 갖고 있던 찬송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찬송이라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찬송치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필자가 눈에 크게 뜨이는 그의 찬송관은 가사에 대한 민감함이다. "Die noten machen den text lebendig" 가사가 살아 생동력 있게 음악을 만들라" 이 이론은 당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죠스켕 데프레(Josquin Des Prez 1440-1521)가 갖고 있던 음악사상으로 루터는 이 죠스켕을 극히 추앙하고 있었다.
죠스켕은 르네상스 시기의 작곡가로 르네상스뿐 아니라 전 시대를 걸쳐 몇 안 되는 위대한 작곡가로 그는 기존의 작곡가들의 관행인 음악을 만들어 놓고 가사를 붙이던 형태를 탈피해서 가사에 음악을 붙이는 합창음악을 만들었던 최초의 작곡가로 꼽히고 있다. 루터는 "죠스켕 만이 음표를 주관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처럼 루터는 모든 음악을 수용하는 가운데 가사의 민감함을 갖고 찬송가를 만들게 된 것이다.
루터의 교회음악 철학은 그가 쓴 "Peri Tes Mousikes, 음악을 위해 -1530년"에 잘 나타나있다. 몇 가지만 서술하면 음악은 세상을 묶는 힘과 질서를 가져오며, 이 질서는 동시에 "신적인 질서" 라고 생각했다. 또한 음악은 사람의 생각, 감각, 마음 감정을 다스리며 하나님이 음악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시며 음악의 감정적 능력이 정신적, 영적 침체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음악 철학이 개혁의 당위성을 알리고 타락된 교회 문화를 바로 세우며 비뚤어진 복음의 방향을 곧게 펴는데 음악처럼 더 한 무기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루터 예배학자이며 루터 연구가인 칼 쉘크(Carl F. Schalk 1929-2021) 교수는 루터의 음악 철학을 정돈하며 "음악은 하나님의 창조와 선물" 이라 하였고 또 한 명의 유명한 루터 학자인 로빈 리버(Robin A. Leaver1939-)교수는 루터의 음악 철학을 이야기하며 음악은 사탄의 마귀를 쫓는 무기요 하나님 앞에 깨끗한 기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고 말하였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보며 음악가 마틴루터가 종교개혁과 개신교, 그리고 서양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이를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중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의 음악이 그의 설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이야기 한다. 스페인의 수도사 토마스(Thomas Jesu(1529-1582)는 "루터의 음악이 유럽 루터란 교단을 확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당시 루터의 음악은 장터에서, 길거리에서 벌판에서 불리고 있었다." 라고 이야기 한다. 한편 루터 자신도 "우리가 복음을 노래한 이후로 우리의 적대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 했다.
두 번째는 성경에서 말하는 찬양의 본질을 회복하게 되었다. 회중들로 하여금 예배에서 입을 열어 찬양할 수 있도록 찬송과 회중찬양인 코랄을 만들어 찬양을 보급 하였고, 미를 추구하는 일에 너무 집착하던 당시 중세 교회음악의 관행을 바꾸어 교회음악의 본질을 다시 정립하게 하였다.
세 번째는 서양음악사와 개신교 교회음악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루터가 서양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독일 음악의 아버지요, 바흐 이전에 가장 위대한 독일의 작곡가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tz 1585-1672), 살아생전에 독일 최고의 작곡가로 바흐에게 큰 영향을 준 디트리히 북스테 후데(Dietrich Buxtehude 1637-1707), 서양의음악의 모든 표준이 이 작곡가의 작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만큼 서양음악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 요한 세바스챤 바흐(Johan Sebatian Bach 1685-1750) 이 외에 필릭스 멘델스죤(Filix Mendelssohn 1809-1847),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 등은 루터의 교회음악에 기초를 두고 이들의 작품을 펼치게 되었다.
이 작곡가들이 쓴 오라토리오, 칸타타, 모텟 오르간 음악 등은 모두 루터의 코랄을 소재로 해서 만들게 된 것이다. 이들의 영향이 결국 바로크 후기부터 서양음악의 중심이 이태리에서 독일로 전환되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갖게 한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스멘드(Friedrich Smend) 는 "만약 16세기 마틴 루터의 음악적 개혁이 없었다면 이후에 나온 바흐의 음악적 성과도 없었을 것이고, 또한 유럽의 모든 개신교 음악은 암흑기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루터의 서양음악과 개신교 교회음악에 끼친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음악은 점점 더 혼탁해져 가는 가운데 코로나가 이러한 것들을 더 부추겨 그 혼미함이 극에 달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는 교회음악의 기준도 없고, 전통도 희미해 져 가는 것 같다. 그냥 사회의 변화에 따라 무조건 흘러가고, 한 교회가 그 어떤 것을 시도하여 좋아 보이면 그냥 무조건 따라 가는 것 같다. 이러한 가운데 종교개혁 504주년을 맞은 올 해,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의 대 혼미함 속에 바르게 펼쳤던 교회음악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교회와 기독교인에게 던지고 싶음직한 조언들을 네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첫 째, 오늘날 교회음악의 작용력에 심각하게 그리고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지나친 내 감정에 치우쳐 찬양을 드리며 그 안에 만족을 찾으려는 것은 바른 찬양이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열심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 찬양의 가사를 잘 점검해야 하고 작곡기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오늘날 찬양 가사는 내가 중심이 된 고백적 찬양에 너무 많이 치우쳐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찬양하는 곡들의 가사를 가까이 하며 성경의 내용을 인용한 가사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심미주의적 아름다움에 빠져 미를 추구하는 멜로디, 또 자극적인 리듬을 사용하여 순간적인 본능을 건드리는 가벼운 음악들이 되지 않게 해야 하고 또 이런 음악을 잘 구분하여 권장하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찬양의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하는 이 본질적 찬양요소를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음악 교육에 깊은 신경을 쓰고 교육을 해야 한다.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 하지만 전통을 무시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지속적인 교회음악교육을 통해 역사의 흐름 속에 변화된 교회음악을 기억하며 자유와 책임의 통합 정신 속에 본질은 절대 양보하지 않은 채, 이 시대의 문화에 맞게 교회음악을 개선하고 바꾸어 가는 것은 안전할 것이다.
윤임상 교수(월드미션대학교)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윤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