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개신교회인 소래교회(또는 松川敎會)는 순전히 우리 조상들에 의해 세워진 자생토착교회로,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교회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이어서, 정확한 설립 연도1)에 대한 설이 분분하지만, 고향 의주에서 박해를 피해온 서상륜, 상우(보통 경조로 통함) 형제가 교회 설립의 주역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글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1명인 서경조 목사가 자신의 전도 활동 및 한국 최초의 교회 설립에 관하여 회고해 1925년 10월 『신학지남』2)에 기고한 글이다. 이 글의 성격이 서경조 목사가 사역을 마무리하고 73세 때 회고해 기록한 글이라 연대 및 지명, 기타 인물에 대한 기억의 오류가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 최초의 목사가 한국 최초의 교회 설립의 역사를 정리해 놓은 것에서 그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글은 이러한 소중한 교회사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시간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대와 거의 한 세기의 간극이 있어 『신학지남』에 실린 세로로 편집된 한문 투의 그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 오늘의 세대는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의 글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윤문(潤文) 및 번역하였다.
한 세기 후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전도와 교회 설립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기를 바라며 서경조 목사의 글을 소개한다.
서경조의 신도와 전도와 송천교회 설립 역사
서경조 목사 기고
본인은 주 후 1852년 임자년(任子年) 12월 14일 의주 출생이라. 1878년에 관광하러 사백(舍伯, 맏형)3)과 그 외 4인이 청국 영구(營口)에 들어가서 마침 의주(義州) 친구 3인을 만나니 해관세무사 영국인 하문덕(헌트, 河文德)4)의 조선어학교사 이익세(李益世)와 영국 목사 막끈태(매킨타이어)5)의 조선어학교사 이응찬(李應贊)과 성경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최성균(崔成均)이라6).
일주일은 세 친구의 인도로 매킨타이어 목사 집 예배처소에 들어가니 청국인 7~8인이 극히 겸손함으로 맞아들여 앉게 하는지라. 청국인의 교만함은 본인이 아는 바라. 이같이 겸손하니 이 예수교 가운데에 필유호황야(必有好況也)7)라 하고 모교지심(慕敎之心)8)이 나타나는지라.
하루는 길을 가다가 중서서원(中西書院)이라고 한 간판을 보고 문을 두드리니 한 청국인이 청입(請入, 들어오세요) 하며, 청좌(請座, 앉기를 권함) 하거늘 中西書院 뜻을 물으니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하여 이 서원을 설립하고 모든 책을 도와쌋코9), 누구든지 보게 하고, 또 각 지역 신문이 이곳에 와서 분전(分傳)10) 한다고 하는지라. 신문과 책들을 많이 보니 참 정중지와(井中之蛙)11)가 큰 바다(大海)에 나온 듯하더라. 예수교 할 마음이 더욱 나는지라.
하루는 매킨타이어 목사가 자기 집으로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며 조선에 통상이 쉬이 되겠으니, 그때 조선에 나가 전도하겠노라 하거늘 이때 나는 통상이 어떠한 것인지, 예수 교리가 어떠한지 몰랐으면서도 마음에 기뻐한지라. 본국에 나온 후에 통상 되기만 기다리더니 1883년 계미년(癸未年) 장연 송천동(松川洞)에 이주하게 된 지라. 이때 형님은 심양에 들어가 라(羅約翰)12) 목사로부터 수세(水洗, 세례를 받음)하고 매서(賣書)13) 직분을 받고 조선 경성에 이거(移居, 이주)하시고, 상경하라는 하서(下書)를 받고 상경하니 마침 그때 심양(瀋陽)으로부터 책 상자가 청상편(淸商便)으로 비밀리에 나온지라.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 책을 가지고 내려와 비밀리에 신약을 두어 번 보아도 알 수 없는지라. 그러나 이 책 속에 기이(奇異)한 술법(術法)이 있으리라 하고 차차 모르는 것은 깊게 생각하여 보기를 수차 내려 보니 더러 알 것이 있는 동시에 전에 기이한 술법을 얻어 보리라 하던 마음은 없어지고 예수교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에, 그 교를 하면 피살(被殺)하리라 하는 마음이 또 생겨 심중전(心中戰)이 일어나는지라.
이는 이전에 조선에서 천주교도를 죽이던 일이 있으므로 나도 이 교(敎)를 하면 죽으리라 함이라. 그러나 예수를 믿어 속죄함과 구원 얻는 줄은 알지 못하더니 로마인서를 많이 본 후 믿음과 속죄 두 구절을 좀 알았으나 마음속의 전쟁은 여전하여 믿을 마음과 구사심(懼死心)14)이 서로 싸우기를 거의 반년이나 수고(受苦)15)하다가 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리오 하고 깊이 생각하다가 성령 받는 일에 대하여 생각이 나기를 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령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리라 하고 믿는 마음을 정하였으나, 그때도 간간이 죽기 두려운 마음이 있어 성경을 많이 상고하여 보고 위로를 많이 받으니라.
예수교가 나오기만 고대하고 있더니, 1885년 을유(乙酉)년 봄에 형님의 하서(下書)를 보고 상경하니 원두우(元杜尤)16) 목사가 전년17)에 나왔는데 서울 사람 한 사람과 의주 사람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았더라. 비밀리 흘벗(헐버트)18) 교사 있는 데서 원두우 목사로부터 수세(水洗)하니라.
이때는 전도약조 없는 때인데 주일에 찬미하고 예배를 하였더니 믿지 않는 미국 공사가 전도약조 없는데 찬미하며 예배한다고 찬미를 금하는지라. 그 후는 조용히 찬미하고 예배하니라.
하래(下來) 후 그해 9월에 원 목사가 유람 공문19)을 가지고 송천에 내려온지라. 병호(丙浩, 서경조의 아들)가 난지 석 달이 되어 유아세례를 받으니라. 동네 여러 사람에게 전도를 하였더니 그다음 해에 원(Underwood) 목사와 아펜셜라(Appenzeller) 목사가 또 송천에 내려와서 믿기로 작정한 5인에게 세례를 주니라20). 이 사람들은 송천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 다 세상을 떠나니라. 나를 두고 보면 교인의 겸손함과 사랑하는 것이 도를 듣는 자의 믿음이 신심이 나게 하고, 모든 책은 전도하는데 요긴하고, 성경은 믿는 마음을 견고케 하는 줄 알리라. 이 아래부터는 전도한 사실이라.
1888년 무자년(戊子年)에 서울에서 처음으로 사경(査經)을 시작하여 10여 인이 한 달 동안을 공부하니라. 다음 해에 심양에 있는 맥(매킨타이어) 목사 앞에서 매서(賣書) 직분을 받았으나 책을 파는 방법은 없고 친구들에게 책 몇 권을 주니라.
8월에 미국에서 의학을 졸업한 청국인이 원 목사께 편지하여 원산(元山)으로 책을 좀 보내 달라 하였으므로 원산에 가는 도중에 동행하는 한 사람에게 전도하고 책 한 권에 동전 두 푼(二分)을 받고 파니 그 사람이 동행하기가 두려워 앞서서 달아나더라. 그날 한 계책(計策)을 생각하고 시골의 한 기와집에 들어가서 날이 저물고 객점(客店)21)이 없음을 빙자하고, 하룻밤을 빌려 자며 밤중에 주인 노인에게 전도하고 10여 권을 내어 주니 주인 노인이 잘 듣고 책을 받아 궤 안에 깊이 넣고 열쇠를 잠그는지라. 왜 책상 위에 놓고 보지 아니하고 감춰두느냐 한즉, 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라고 하느냐 하더라.
원산(元山)에 들어가니 이때 괴질이 크게 발생하여 길가에 반은 묻히고 반은 드러난 송장이 총총한데 역겨운 냄새는 촉비(觸鼻)22)하는지라. 시가에 들어가니 집집이 문을 닫고 인적이 뇨뇨(寥寥)23) 한지라. 해는 지고 객점을 얻지 못하여 방황하니 한 부인이 가련히 여겨 방을 허락하는지라. 들어가 보니 봉창(封窓)한 종이는 반이나 없어지고, 습기는 불 때던 집 같지 아니하고 헤어진 돗자리 하나밖에 없는지라. 할 수 없어 저녁밥을 얻어먹고 밤을 앉아서 새우다시피 하고 아침에 청관(淸館)에 가서 그 사람을 며칠 동안 찾다가 찾지 못하고 마침 의주 사람 두 친구를 만나 전도하고 책 몇 권씩 주고 비감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돌아 오니라.
원 목사는 송천을 다녀간 후 평양으로 의주(義州)로 강계(江界)로 돌아오며 전도한 일이 있었더라. 이 해에 서울에서 또 사경회를 하는데 서울 사람과 장연 사람과 의주 사람이 모여 한 달 동안 공부를 한지라. 마치기 전에 침례회 목사 편육(펜윅)24)을 몇 차례 상종하니 이 사람의 성품이 이상하여 어학 선생을 가끔 갈아대니 필경은 선생을 얻을 수 없는지라. 하루는 울며 말하기를 나는 어학선생을 얻을 수 없어 말(言語) 공부를 못하게 되니 본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하며 비감하여 한지라. 이에 나와 의론하고 송천으로 같이 내려가 어학도 하며 전도하기로 작정하고, 사경을 마친 후에 원 목사가 나한테 부산에 배(배위량) 목사25)와 같이 내려가 자리 잡고 일하라 하거늘 내가 펜윅을 위하여 어학 하기로 작정한 일을 말하고 한 1년 동안 지내보겠노라 하니 원 목사는 불평하여 하더라. 원 목사는 본국에 들어가고 마삼열(마펫) 목사26)가 그 대신 서울 일을 보게 하더라. 나는 매서(賣書) 일을 놓고 집으로 돌아오니라. <계속>
[미주]
1) 소래교회 설립연도에 대해 한규무는 그 연대를 빨라야 1885년이라고 단정한다. 한규무(2019) 한국개신교회의 기년(紀年)과 소래교회, 한국기독교문화연구, 11, 101-123
2) 신학지남(神學指南)은 1918년 3월 20일 창간된 장로교신학교 교지이다. 이 책은 조선야소교서회에서 1918년부터 1940년 10월까지 제22권 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후 1954년 속간이 되어 현재는 총신대학원에서 계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3) 서경조의 맏형 서상륜을 말한다. 서상륜은 1878년 동생 경조(본명은 相祐)와 함께 홍삼 장사차 영구에 갔다가 열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대한성서공회사Ⅰ.』, 대한성서공회, 1993, 38쪽
4) 헌트(Jonathan. H. Hunt). 영국계 미국인으로 1885년 10월 5일 신임 총해관세무사 Henry F. Merrill을 수행해 입국.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12일까지 아펜젤러와 함께 평안도 지방(송도, 평양)을 함께 여행하기도 했으며, 이후 부산해관 제3대 해관장으로 1888년부터 1898년까지 근무했다.
5)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1837~1905, 한국명 마근태 馬勤泰), 로스의 매제요 동역자로, 이응찬을 어학선생 삼고 한국어 번역 성경 보급의 물꼬를 텄다.
6) 이만열은 그의 논문 〈서상륜의 행적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서 “서경조의 방문은 1880년 이후로 생각된다”라고 주장한다.
7) ‘반드시 호황이 있을 것이다’라는 뜻
8) 가르침을 사모하는 마음
9) 도와 쌓고, ‘쌓다’는 동사 뒤에서 ‘-어 쌓다’로 쓰이는데, 앞말이 뜻하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그 행동의 정도가 심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문) 아이가 울어 쌓는다. 그렇게 동생을 놀려 쌓으면 못쓴다. 여기서는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말이다.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김은철 교수
10) 몇 군데로 나누어서 전(傳)함.
11) 우물 안 개구리
12)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 서상륜의 수세 연도는 기독신보 1872년부터 이글 1883년까지 다양하다.
13) 매서인은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성경책을 팔고 전도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교 초기 성경 보급의 선구자요, 초대교회 개척의 주역이었다. 이진만, 《매서인(권서)은 교회설립의 선구자였다!》, (준 프로세스, 2020), 18쪽.
14)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15) 현대 국어 ‘수고’의 옛말인 ‘슈고’는 한자어 ‘수고(受苦)’에서 온 것이다. 자료: 네이버사전
16)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
17)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다.
18)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
19) 외부(外部)로부터 외국인에게 발행된 여행허가증인 호조(護照)를 말한다.
20) 언더우드의 제1차 북부전도 여행(의주까지)은 1887년 10월이었고 유아세례는 3명이 받았고, 백홍준의 처 한 씨, 이성하의 처 김 씨 2명이 여성 최초의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와 함께 송천에 내려간 해는 1888년 4월 초이며 세례받은 이는 7인이다. 『언더우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15, 377쪽.
21) 지난날, 길손이 음식이나 술을 사 먹거나 쉬던 집, 旅店.
22) 냄새가 코를 찌름
23) 매우 적막함
24) 펜윅(M. C. Fenwick)은 서경조와 공역했던 1891년의 〈요한복음젼〉을 독자적으로 번역·수정하여 1893년 순 한글로 된 〈약한의 기록한대로복음〉을 발행했다. 『대한성서공회사Ⅱ.』, 대한성서공회, 1994, 91쪽
25)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 한국에 와서 부산에 선교거점(Station)을 개설한 후, 대구 지역에 선교지부(Sub-Station)를 개척하고 평양으로 가서 한국 최초의 대학 숭실학교를 설립했다.
26)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1864~1939, 한국명 마삼열),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평양선교를 위해 마 선교사를 1890년 파송하였다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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