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언약의 확증으로서의 제사와 예배
신약의 교회와 그들의 예배는 구약성경에서 이어져 내려온 메시야의 대망과 재림의 소망을 지속적으로 공유한다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신약교회에서는 예배와 성례에 있어서 구약의 의식들과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신약교회에서는 더 이상 아들을 위해서 할례를 시행하지 않으며,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으며, 유월절 절기를 예배의 일부로 지키지도 않는다 (고전 7:17-21). 구약성경에서는 성전이 예배의 중심장소였으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의 구원사역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성소의 휘장이 찢겨졌다. 더 이상 그곳에서의 예배란 무의미하다는 하나님의 뜻이 선포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의 원형으로서 구약시대에 제사의 제도 (system)를 명쾌하게 제정해 놓으셨다. 제사장 마음대로, 혹은 바치는 사람의 뜻대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구약성경에 강조된 희생 제사를 간략히 살펴보아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들이 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지속되어 내려온 언약관계는 항상 희생 제사를 통해서 확정되었다.
또한 예배자의 태도를 매우 중요시 하였다. 아벨은 겸손하게 신실하게 “믿음으로” 제물을 바쳤다 (히 11:4). 우리는 동물을 희생시키는 제사의 근원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을 알게 된다. 그 후로 노아는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바쳤다 (창 8:20-9:17). 아브라함은 삼 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로 번제를 드렸다 (창 15:9-21).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았다 (창 26:24-25). 야곱은 벧엘에서 단을 쌓았다 (창 35:6-12).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일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였던 사건을 매우 특별한 사건으로 대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올라갔을 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질문했던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나무와 칼이 있는데,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이 질문에서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이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행동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산 위에서 어린 양으로 바쳐질 사건의 예표였던 것이다.
출애굽 이후에도 번제물을 바치는 희생 제사가 언약을 지켜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출 24:5-6). 하나님께서는 친히 희생 제사의 절차와 그 시행을 담당하는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정도 알려주셨다.
번제를 드리는 제사의 의미는 속죄의 피라는 중요한 뜻이 담겨 있었다. 일 년에 한 차례 정한 날에 이르러서 제사장이 동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민족의 죄악에 대한 속죄를 선포했다 (레 16:1-34). 희생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에 대한 대속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에게서 흘리는 피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상징적인 피흘림이었다. 비록 이스라엘의 죄는 여전히 남아있을지라도, 희생제물의 피에 의해서 가리움을 받게 되어져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죄를 추궁하지 않으신다.
희생 제사는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교회의 예배에서도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대속적인 희생 제사였고,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라고 명쾌하여 풀이하였다 (히 9:11).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는 화목제물이다 (롬 3:25).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이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언약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물인 것이요(사 53:4-5), 그 백성들의 죄악을 가리우는 것이어서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 “다 이루었다”(벧전 2:24)고 선언하였다.
교회에서는 예배 가운데서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감사와 은혜를 맛보게 되며, 악한 세력을 이기고 승리하시려고 몸을 바친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와 축하의 잔을 나눈다.
4) 성막과 성전과 회당에서 교회로의 전환
구속역사의 진행 과정에 따라서, 회막과 성전에서의 제사시대가 지나가고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올리는 신약시대의 새 언약이 전개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배의 장소와 본질의 전환이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장소와 시기가 매우 중요한 본질이었다. 지성소의 제단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하나님의 임재장소로 간주되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머물러 계시는 장소로 간주되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머물러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마치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것을 다시금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 후로 오백 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영광을 드러내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다윗은 4천 명을 성전건축을 위해 훈련시켰다 (대상 23:1-6).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다윗에게 내리신 지시에 따라서 완성했다 (대상 28:11-13, 19). 하나님께서 직접 다윗에게 내리신 계시대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제1차 성전이 파괴된 후,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구약시대의 신실한 임무 수행자들처럼, 신약교회의 예배도 하나님의 명령에만 따라야 하는데,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모두 다 청결한 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고 명령하였고, 또한 자신에게 경배를 올리는 것도 허락하였다 (마 4:10, 눅 4:8, 요 20:28-29).
참되고 순수한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예수님은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였다 (요 4:20-24). 한국어 옛 번역에는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예배를 시작하면서 낭독한다.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 구절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암송했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예배의 선포사로서 사회자가 읽어 내려가는 시간에 그저 엄숙할 뿐이라는 생각에서 고개를 숙인다. 아무런 마음의 감동도 없이 낭송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정확하게 헬라어 본문을 영어로 번역하면, “in the spirit and in the truth”이다. 여기서 소문자 ‘영’(the spirit)은 “성령”(the Spirit)의 인도하심과 임재하심 가운데서“라고 풀이할 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점은 참된 예배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순종함으로 시행되어진다고 가르친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나 지침들에 의존해서, 여기서나 어디에서나 예배 장소를 마음대로 정해서도 안 되고, 예배 시간과 내용들을 제멋대로 지어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항상 정해진 절기에 제사와 경배를 드리러 모이는 일에 힘썼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집에서 날마다 진행되는 예배에 참석하기를 사모하였고, 기쁘게 노래했다 (시 122:1). 이 기쁨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모든 예배자가 갖추고 있는 마음 상태이자, 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에 대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온전한 예배를 요구하였다. 신성한 율법의 내용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이다. 안식일 규정을 통해서 엄숙한 지침이 주어졌으니,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영광과 찬양을 올려야만 했다.
안식일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는 날이요, 둘째로 언약적 행동으로 하나님께 반응으로서의 예배를 올리고, 믿음을 나타내야만 하는 날이다. 안식일 준수는 결코 폐지될 수 없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행위로 의를 성취하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어떤 행동을 금지하는 조항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의 깊은 의미는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케 하시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살아가는 거룩한 구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시고자 함이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날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행동들을 믿음에 수반 되어지는 행함으로 강조하였다 (약 2:17-26).
안식일에 금지한 일은 요즈음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것들을 쟁취하려는 행동(servile)이다. 일상의 가정과 일터를 보전하는 행동을 전면금지한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먹으려고 불을 피우거나, 그것을 위해서 나뭇가지를 모으는 행위를 금지하였다. 이런 자들은 중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냥 생명을 보전하는 행동 (preservation)은 허락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양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구출해 내야하고, 불이 나면 당장 진화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행위들은 재물이나 재산을 증식하려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다. 성막에서도 일하는 행위를 금지했는데, 다른 날들에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시대에 주신 안식일 제도, 성전의 제사 규정과 형식들은 점차 타락한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모두 다 파괴되고 말았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성전제사의 “형태”만 남았고, 안식일 준수의 “본질”도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누구도 동물 제사를 시행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성전의 제단이 파괴되었기에, 더 이상 제물을 드리지 못한다고 변명하고 있다. 성전시대가 지나가고 회당제도로 모였는데, 그 예배 내용은 성전과 대동소이했다.
이제, 신실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제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내용들을 예배시간에 시행하고 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공적인 기도, 찬양, 금식, 설교, 성경낭독, 그리고 주일 성수와 세례와 성찬을 중요시하고 있다.
히브리서 12장 22-29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서 예배를 올리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훈들을 발견하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임재 하셨고, 구약 시대의 예배에서도 임재 하였으며, 신약시대의 예배에서도 동일하게 임재 하신다.
시온은 다윗이 통치한지 칠 년 만에 점령한 성채이다. 그곳은 예루살렘 남쪽 편에 위치한 곳으로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를 좌정시킨 곳이다. 시온 산에 이어진 북쪽 편 땅 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상징적인 건물이 되었다. 시편 122편 3-4절에 의하면, 다윗의 시온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이는 장소였다.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서는 새로운 시온 (New Zion)이 가장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이 새로운 시온에서 성도들이 예배의 모임을 갖게 되며, 하나가 된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장소이다. 이곳에서의 모임은 장자들의 총회이며, 하늘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로 구성된다. 옛 이스라엘은 다윗의 시온에서 모였으나, 새 이스라엘은 하늘에 있는 시온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 (히 12:23).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서 모이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모습이다.
새 시온에서는 연합된 백성들이 하나가 되어서 모임을 갖는다. 이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완전한 세대를 상징한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영광의 몸으로 함께 하시면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기독교 신자는 개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족의 일원으로 함께 모여서 경배를 올린다.
5) 교회 안에서 받는 은혜
종교개혁 이후의 복음적인 신학자들은 성도는 교회 안에서 거룩한 삶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네 가지 중요한 방편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선포된 말씀
거룩한 하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선포 가운데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말씀하시고, 자신을 아는 지식을 불어넣어주신다. 먼저는 설교자에게 성령으로 감동하시고, 경건한 성도들로 하여금 경외, 기도, 사랑, 복종, 신뢰를 가지고 반응하게 하신다. 성령은 설교자를 통해서 “성도들을 새롭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해 나간다.” 더욱이 선포된 말씀은 영혼의 치유와 씻음과 고장난 곳을 수리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한 방편이다.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는 설교자는 영혼의 의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둘째, 성례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역과 동일하게, 세례와 성찬을 통한 성례들도 연약한 자를 격려하고, 양육하며, 교화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는 외적 상징들과 함께 작동한다. 성례를 시행하므로써,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시키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살아있는 제물로 기꺼이 헌신하도록 이끌어주신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신자의 씻음을 상징하며, 인치는 예식이다. 하늘의 아버지에게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표식이며, 성령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을 의미한다. 성만찬도 역시 성도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와의 연합됨을 의미하는 것이요, 새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빵에 참여함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성례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성장하게 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에 동참하게 되는 유일한 수단이다.
셋째, 성도들의 교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의 교제에 참여해야만 한다. 거룩함 가운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조언자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을 가꾸는 길이다 (고전 11:1, 엡 4:12-13). 교회에서는 성도들 상호간에 돌봄과 기도의 교통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행 2:42, 고전 12:7).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서로 병 낫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존경하는 길을 가는 성도와도 교제하여야 한다 (잠 13:20, 골 3:16). 다른 성도들과 격리 상태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삶은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결함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영원한 나라의 시민들이어서,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 받은 바 은사들의 나눔을 실현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은사들을 제공하는 교제를 감출 수 없고, 숨길 수 없다. 경건한 삶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나”, 혹은 “오직 성경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숙하게 된다. 나홀로 이기적으로 살거나, 개인주의를 고집하는 삶은 조화와 균형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태도이다.
넷째, 교회 권징의 시행
교회의 권징을 통해서 영적인 성장과 발전이 이뤄지는데, 이것은 교회에 주신 은혜의 수단에 긴밀히 연결되어있다. 벨직 신앙고백서 (1561년), 32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서 모든 성도들을 보호하고, 연합시키며, 일체감을 갖게하고, 영적인 능력을 공급하기 위해서 시행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여야할 성도는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마땅한 성도의 반응과 태도를 드러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도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운데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친다.
다함께 모이는 교회는 경건한 성도가 마땅히 지도를 받으면서 영혼을 가꿔가야 하는 곳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도 매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며, 나그네와 이웃을 대접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도의 삶은 가정에서나, 시장에서나, 직장에서나, 휴양지에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은혜를 반영하고 드러내야 한다. 우리는 교회의 상황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거나, 메마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거룩한 성도로서 매순간 감격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넓은 마음으로 역동적인 생활을 가꿔나가야만 한다. (끝)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 명예교수,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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