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Romanticism)는 유럽에 18세기 말에 계몽주의에 뒤따라 나타나 19세기 말(1890)년까지 왕성하였던 예술적, 문학적 음악적 및 지적 운동이다. 낭만주의가 나타난 배경은, ① 계몽사상의 합리주의와 고전주의와 귀족적 사회적 정치적 규범, 절대적인 것 등에 대한 반발심. ② 인구증가, 도시의 확대, 산업화 등으로 표상되는 산업혁명에 대한 반발심. 그래서 낭만주의 시대에 “중세”를 그리워하는 중세주의가 나타났다. 중세주의란 과거의 중세 봉건사회나 이국적인 것에서 이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이야기는 중세적이다) 그리하여 민속예술과 고대 관습을 고상한 것으로, 그리고 고대 “영웅”들을 사회를 개선시키는 모범으로 보고 높이 기렸다. ③ 뉴턴역학 등 과학이 성장하면서 자연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지식이 쌓이자, 자연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는 경향에 대해 반발심이 나타났다. 그리고 ④ 의학의 발달 등이다.
의학의 발달이란, 1770년대 이후, 여성 난소의 발견, 태아에서의 고환의 하강의 발견, 가축들의 인공수정 기술 발달 등 성생리학의 발달 등이다. 특히 인공수정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식과 성적 쾌락을 분리시킬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는 자연스레 동물적이고 기계적인 섹슈얼리티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섹슈얼리티로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이는 필자가 볼 때,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사회보다 자연(Nature)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미적 범주에 접했을 때 경험하는 불안, 공포, 경외 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이성보다 직관과 강렬한 감정을 미적 경험의 진정한 근원으로 보았다. 감정과 미적 경험이란 결국 관능과 감성의 발견이며, 이들은 섹스에서 가장 강력하게 경험한다. 낭만적 감성은 주로 로맨스로 나타났다. 낭만주의는 개인을 강조하고, 개인적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중요시하고, 환상과 과거를 미화하였다. 자연히 낭만주의자들은 과거, 특히 중세나 이국적인 것에서 이상을 찾았다. 낭만주의의 특징들 중 하나는 심오한 종교적, 초월적, 신비주의적 감정이다. 예를 들어 독일 낭만주의의 키워드는 “영원에 대한 뜨거운 갈증”,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추구”,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동경” 등이었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감정의 힘을 인정하고, 계몽주의와 더불어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기대하면서, 종교에 의해 억압된 인간성을 해방시키자는 사조의 발달과 정치사회적 혁명에 기여하였다.
이런 변화는 특히 문학에서 눈에 띈다. Samuel Richardson의 『Clarissa』(1748)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와 낭만적 문학의 최고봉으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등이 그러한 예이다. 더불어 낭만적 연애시들이 나오면서 “자유연애 ”(free love)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책의 시장에서는 구애, 결혼, 정조, 그리고 여성의 독립 등이 인기 있던 주제가 되었다. 점차 자유연애나 로맨스에서 더 나아가 유혹의 위험성, 매춘, 난봉꾼과 유명인의 성적 행태, 음란물 등 노골적인 성을 묘사하는 책이 등장하였다, 이는 섹스에 대한 기독교적 죄의식을 공공연하게 무시하는 것이었다. 유명한 예는 John Cleland의 『Fanny Hill』(1748), 사드후작의 『Justine』(1791) 등이다. 에로물(erotica)들은 금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흥 인쇄산업과 철도 등의 발달로 빠르게 넓게 유럽에 퍼져 갔다. 자유사상가 방탕자들(libertines)들은 (예를 들어 카사노바) 여러 도시들로 성적 모험의 여행을 다녔는데, 실상 성적 모험의 대상은 대개 매춘부들이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의 섹스는 여전히 억제된 채였다. 낭만적 논리도 “이성”을 가진 남자에만 해당되었다. 그러나 성찰적이며 욕망하는 엘리트들에 의해 근대적인 성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성 자유를 향한 공개적인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조금씩 성에 허용적인 사회가 되어 갔다. 그만큼 기독교의 성도덕도 훼손되어 갔다.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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