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자녀가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하는 ‘부성(父姓) 우선’ 원칙을 폐기하고,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이른바 ‘비혼 커플’도 법적인 가족으로 인정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여성가족부(여가부)가 27일 발표한 이 계획에 대해 교계는 건강한 가족제도를 해체할 수 있는 위험한 시도라며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가부는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을 당장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가 2025년까지 추진할 방침이다. 향후 5년 동안 관련 법률 개정 등을 통해 기존 가족제도의 틀을 완전히 뜯어고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가족’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동거 및 사실혼 가정, 노인 동거 등을 ‘법적 가족’의 범주에 포함함으로써 야기될 사회적 혼란이 건강한 가족제도를 뿌리째 흔들 수도 있을 거란 점이다.
정부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최근 방송인 사유리 씨가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 출산’한 것에 대해 여론이 아주 부정적이지 않다는 데 영향을 받은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 온 가족제도의 획기적인 변혁을 그런 특별한 사례를 계기로 이참에 밀어붙이려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가부가 가족제도의 틀을 바꾸겠다고 내세우고 있는 근거는 사회적인 변화의 흐름과 국민 공감대이다. 세상은 변했는데 법이 못 따라가고 있으니 바뀌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면서 지난해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혼인과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한다면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전체의 69.7%에 달했다는 수치를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여론’이란 사회의 정치적 이슈에 대한 국민의 집합적인 의견을 뜻한다. 국민의 뜻을 존중하는 민주 사회에서는 다수의 국민이 공유하는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이 여론이 중시되는 이유는 국민 의견의 지표로서의 가치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여론조사가 만능은 아니다. 모든 응답자가 복잡한 사회 현안에 대해 모두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밝혀야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예고 없이 낯선 사람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밝혀줄 것이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섣부른 것이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정부가 여론조사 수치를 참고하는 것은 타당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수시로 바뀌는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가부는 여론조사를 근거로 ‘새로운 가족’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해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것이다. 가족의 범위를 배우자와 직계혈족 및 형제 자매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민법 779조가 그 대상이다.
그러나 교계는 민법상 가족의 범위를 확대하는 내용의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이 우리 사회의 건강한 가족제도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 수 있다고 보고 분명한 반대의 뜻을 표해 왔다. 교계는 또 여가부가 “앞으로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한 사안”이라며 이번 계획에 ‘동성 커플’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번 계획에는 빠졌지만, 지금의 흐름대로 라면 정부가 ‘동성혼’을 건드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동성 커플’을 법적 가족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한국교회연합은 지난 2월 더불어민주당 정춘숙, 남인순 의원 등이 ‘건강가정기본법’을 ‘가족정책기본법’으로 개정 발의하자 이것이 ”향후 동성결합과 동성결혼의 합법화의 문호를 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교회총연합도 가족의 구성 방식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 규정한 현행 건강가정기본법에 ‘사실혼’을 추가해 비혼·동거 가정도 가족 범주에 포함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목소리가 보수 기독교계의 울타리를 넘어 가톨릭에서까지 같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할 점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인 염수정 추기경은 지난 21일 ‘생명 주일’을 앞두고 발표한 담화문에서 “여성가족부가 추진하는 ‘비혼 동거’ ‘사실혼’의 ‘법적 가족 범위 확대 정책’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가치로 여겨졌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며 “평생을 건 부부의 일치와 사랑, 그리고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가정의 고유한 개념과 소명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현행 건강가정기본법은 가족관계에 관한 기본 규범인 민법에 따라 충실하게 가족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라는 가족의 정의를 의도적으로 허물어가며 이와 전혀 다른 가족 형태를 인정하려 하고 있다.
정부는 세상과 국민 눈높이가 변했다는 이유와 구실을 대고 있으나 이런 시도가 민법의 질서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해온 건강한 사회 규범을 해치고 부정하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그 후유증이 심각할 수 있다. 가족관계로 형성된 지극히 통상적인 규율과 가치, 질서를 부인하고 별도의 가족개념을 삽입해서 얻는 사회적 이득이 무엇인가도 곰곰이 따져봐야 할 문제다.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법제화하는 과정에서 이념이나 정파가 개입해 그 인권이 인권을 훼손하는 나쁜 결과를 야기하게 되고, 사회 공동체 전체에 혼란으로 이어진다면 그런 제도의 변혁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정부가 추진하는 ‘제4차 건강가정 기본계획’의 핵심인 ‘새로운 가족’에 ‘차별금지법’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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