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되었다. 몸이 가까울수록 사람은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데 ‘사회적’이라는 전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두기’가 일상화되면서 사람사이의 마음도 멀어지게 될 것 같아 염려가 되기 시작한다. 몸은 떨어져도 마음만은 가까워지기를 바라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했던 비대면의 일상이 정상적인 일상이 될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서서히 높아지고 있다. 확실히 인간은 적응적인 존재인지라 어느덧 이러한 거리두기는 그것이 지닌 긍정성과 부정성은 뒤로 하더라도 서서히 편해지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런데 사실 그 거리가 너무 멀지 않는다면 인간사이의 거리는 치료적인 면이 있다. 사람이 너무 가까우면 강렬한 심리적 에너지는 전달되거나 공유될 수 있지만, 때로는 그 강렬함이 갖는 원시성 때문에 불편하고 숨 막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기가 신생아일 때는 엄마의 전적인 강렬한 사랑의 개입이 요구된다. 아이에게만 몰두하여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나와 아기만 존재하는 그런 양육적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러한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태도를 ‘대상으로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아이에게 전적으로 몰두하는 엄마의 강렬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엄마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으로 아기는 안전하던 엄마 뱃속과는 다른 이 ‘험한’ 세상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는 그대로 멈추어 있는 존재가 아닌지라 서서히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아이는 성장하면서 그동안 강렬했던 어머니의 원시적인 사랑을 필요로 하던 데서 서서히 성숙하고 발달적인 어머니의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아이는 서서히 혼자서 세상을 탐색하기 시작하며, 어머니를 비롯한 세상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 때 성숙한 어머니는 아이의 호기심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의 성장을 위한 분리,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건강한 틈을 축하해준다.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에서 ‘환경으로서의 어머니’역할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마치 넓고 큰 낮은 울타리를 세워주고 그 안에 맘껏 뛰어 놀게 해주는 넉넉한 마음의 공간이 어머니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낮고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아이는 맘껏 뛰며 놀며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가 몰두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한편으로는 강렬한 애착과 집중, 뜨거운 충만함을 느끼게 하지만 이러한 강렬함에는 원시성이 함축되어 있어서 객관화가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관계가 성숙해 나간다는 것은 그 둘 사이의 성숙한 틈을 인정하고, 숨 쉴 여유를 주며, 서로의 개인적 세계를 인정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 상담에서도 그러하다. 도움을 받는 내담자는 도움을 주는 상담사가 강렬하게, 자신만을 배려하며, 격려하며 심지어 편을 들어주기를 바랄 수 있지만, 상담사는 그러한 내담자의 욕구를 전적으로 충족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약속된 정도의 돌봄만을 제공하는 ‘적절한 좌절’경험을 통해 내담자의 현실 검증력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으며 관계에서는 헌신과 배려 때로는 절제와 인내가 필요함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다. 너무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여 일거수일투족 문제에 대해 답을 주는 것도 상담사의 문제 행동이 된다. 반대로 너무 무관심하여 무정하고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그래서 상담사는 이 내담자와의 관계에서 건강하고 치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배우는데 주력한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갖가지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와 치료적 거리를 유지하신다. 마태복음 13장의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내용을 보면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미리 구체적으로,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지 않으심을 본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 그리고 마지막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통해 열매 맺는 비밀을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다(마태복음 13장 1-9절). 당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 자체보다 우리의 ‘들을 귀’가 자라는 데 관심하시는 것이다. 생각의 힘을 기르고 통찰력을 키워 깨닫게 되는 것에 관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왜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우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일까? 제자들도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비유가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방법이라고 하신다. 천국은 이러이러하니 이렇게 하면 들어오는 것이라며 강요에 가까운 충고나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숙고하게 하시는 것이다. 생각의 틈과 여유를 갖고 스스로 생각하며 묵상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너무 쉽게 내가 생각하는 정답을 강요하고 주장한다. 심지어 신앙적인 것, 성경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주장하며 상대방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른 태도라고 믿고 있지만 때로는 독선에 가까운 태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아이가 열심히 놀이하며 성장할 때 엄마가 간섭하지 않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아이의 놀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성장의 기회를 주듯이,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험에 빠지려 할 때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도와주듯이 성숙한 관계는 매순간 숨 막히게 개입하는 것이 아닌 약간의 틈을 주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숙고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예수님도 바리새인을 향해 훈계하고 명령할 말씀이 얼마나 많으셨겠는가? 아니 바리새인에게 갈 것도 없다. 여전히 이 땅의 메시아 왕국을 꿈꾸며 예수님을 좇고 있는 제자들에게 책망할 말씀, ‘정답’이 얼마나 많으셨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하시고 깨닫도록 하시고 제자들에게 생각할 여유를 주신다. 그 관계의 틈이 주는 묵직하고 단단한 힘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가 몇 단계가 될 것인가가 우리의 관심과 화제의 중심이 되어 있다. 생업이 달린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만큼 중요한 것이 ‘마음의 거리’ ‘관계의 거리’이다.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 마음으로까지 멀어지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너무 우리가 서로 멀어져서 낯설어 질까봐 두려워진다. 아니면 집콕의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가까운 가족끼리 너무 관여하고 경계를 인정하지 않다가 간섭이 될까봐 또한 두려워진다.
이 뿐 아니다. 때로는 내 마음에도 틈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것에 너무 매여 있지는 않은지,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말과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니면 반대로 내 마음에 전혀 무관심한 채 습관대로 살며 나를 방치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때로는 내 마음의 각각의 방에도 틈과 여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약간씩 거리를 두고 환기가 되도록 말이다. 그럴 때 내 생각의 여유도 생기고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에서도 자유로워진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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