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 4장 1-11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광야의 시험을 살피기 전에 이 시험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봐야 하는데,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사건 바로 직후였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처음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에게 소명선언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소명의 첫 사역지는 어디였는가? 정치 1번지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권력의 상징인 헤롯 왕궁도 아니었다. 바로 광야였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 자에게 일할 수 있는 소명을 주셨다는 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막상 소명의 자리는 어디인가? 꽃길이 아니라 광야가 더 많다. 광야는 방해 요소들이 많은 곳이다. 광야는 맹수의 공격이 있다.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다. 또 결핍과 굶주림의 장소이다. 혹시 여러분들도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소명을 받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은 광야가 아닌가? 그러나 그 시간은 원망의 시간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빚어 가시는 카이로스의 시간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사람들은 광야를 불편한 곳으로 여긴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하다. 그러나 광야를 통과하지 않는 영성은 위험할 수 있다. 사두개인을 보아라. 그들은 현세적 물질적 축복만을 강조했다가 결국 부활을 믿지 않았다. 바리새인의 영성은 무엇이었나? 율법을 규범의 틀 안에만 가두려고 했지 광야의 시간을 통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율법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만 삼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성은 무엇인가? 광야의 영성이었다. 광야는 인간은 극소화되고 하나님은 극대화되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한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전적으로 의지해서 넉넉히 이겨 내시길 축복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광야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가? 사단의 세 가지 시험 통과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 시험은 돌덩이를 떡덩이로 만들라는 것이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 그런데 뭐라고 전제를 다는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말은 조건이나 의심도 아니었다. 이미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천명하셨다. 그런데 마귀는 왜 다시 전제를 묻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이것도 못 하느냐 조롱이었다. 빨리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먹어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마귀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속삭인다. 좀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아라. 이러한 코로나 상황에서 무슨 예배냐? 믿음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현실의 문제에 타협하고 살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방종하고 타협하는 신앙이 아니라 절제와 섬김으로 낮아지는 신앙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둘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의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에 돌이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5-6절). 사단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보호하신다고 말씀 인용해 가면서까지 말이다. 마귀의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이용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것이었다. 우리도 이러한 마귀의 의도에 놀아날 때가 많이 있다. 말씀을 내가 필요한 본문만 취하고, 내가 원하는 말씀만 받아들일 수 있다. 예수님에게도 마귀는 말씀을 네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말씀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다.
셋째 시험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게 절하면 만국 통치권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8-9절). 광야는 가장 낮은 곳이다. 그러나 사단은 가장 높은 산으로 유혹한다. 그러나 높은 산으로 유혹하는 것은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단의 계략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 똑같은 유혹을 예수님에게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높아지지 않았다. 결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은 어떻게 사단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이길 수 있었는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7절).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절). 세 가지 시험 가운데 예수님은 모두 동일하게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예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셨다는 말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마귀의 소리보다 말씀의 소리에 순종할 때 승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싸움이다. 우리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다.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할 때 광야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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