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베드로 전서 2장 1-10절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 사도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나그네이다(벧전 1:1). 여기서 말하는 나그네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터키 지방을 말한다. 이 편지를 쓴 시기는 AD 64~65년쯤이었는데 당시 극심한 박해가 휘몰아치는 시대 상황이었다. 당시 그 시대는 네로 황제가 통치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네로 황제는 “폭군, 광기”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극악무도하였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박해했냐면 로마의 대화재를 일으키고, 그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씌웠다. 또 그리스도인들을 원형 경기장에 가둬 놓고, 짐승들의 밥이 되게 했다. 펄펄 끓은 가마솥에 인간을 산 채로 던져 삶아 죽이기도 하고, 사람을 눕혀 놓고 큰 톱으로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그러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둘씩 신앙을 포기하고 했고, 급기야 배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급하게 펜을 들어 흩어진 성도들을 위로하고, 신앙적인 가이드라인을 주기 위해서 편지를 썼던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장차 올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지금의 고난은 인내하라”이다. 이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나그네”이다. 나그네는 베드로 전서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나온다. 왜냐하면 지금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이 땅에 삶은 희로애락의 연속이다. 그런데 좋은 일과 행복한 일만 많으면 좋으련만 막상 현실은 슬프고 아픔의 시간이 더 많다. 이때 현실의 고난을 이기고 장차 올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바로 나그네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그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첫째, 버림과 채움의 신앙이다. 나그네는 쓸데없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1절). 여기서 ‘그러므로’는 1장 23~25절에 대한 접속사로 너희들은 이미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악독과 기만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들은 거듭난 백성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내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내 것이 아니라고 거절해야 한다. 거듭나기 전에 사단에 종노릇 하던 때에 모습이라고 손절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붙들고 산다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했는데 노예근성으로 사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죄에 종노릇 했던 습관들을 이제는 복음의 능력으로 버리기를 축복한다.
이제 비웠으면 뭐를 해야 하는가? 무엇으로 채워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나 너희로 구원이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하심이라”(2절).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근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애굽 하게 하셨다. 노예근성을 뽑아내기 위해서 철저하게 훈련시키신 것이 있었는데, 말씀이었다. 그들이 출애굽하고 가장 먼저 만난 것이 굶주림이었다. 그때 하나님은 주린 배를 하늘의 만나로 채워주셨다. 그때 만나를 채우신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물리적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먹느냐보다 우리가 먹는 것이 누구에서부터 왔느냐를 아는 것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다.
둘째, 성전의 신앙이다.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어라”(5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하게 하신 위한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인가?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었다. 바로가 주인인 애굽에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에게 성막은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해야 했다. 그 성막은 물리적인 성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이 되어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것이 누구를 통해서 온전히 성취되는가? 완전한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것이다. 구약에서는 제사장만이 있을 때, 성막에서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제사장화 시키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배는 본질이자 정체성이다. 고단한 이 땅의 삶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불같은 시험 같은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때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씀과 예배이다. 말씀과 예배의 자리가 나그네와 같은 인생에 길을 열 것이고, 힘과 도움이 될 것이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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