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인의 모든 삶은 주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어디 인생길뿐이겠습니까? 시편 139편 기자에 따르면, 모태에서 나를 조성하시고 빚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내 오장육부와 정신과 영혼을 지으심이 참으로 신묘막측하다고 감탄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태에서 나오기 전부터, 나를 위해 정해진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내 일생을 다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마치 ‘펼쳐진 책’처럼 나의 삶의 이력이 주님 앞에 훤히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 전부터 우리를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떠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내 생명의 주권자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님’이라고 합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존재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비록 어둠에 처한 피조물은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모든 피조물에게 계속해서 비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에 대해서 오직 경외함을 가져야 합니다. 최소한 믿는 자는 자살, 안락사, 사형제도, 낙태 등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에는 결연히 ‘NO’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따라서 생명권이 인권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낙태죄 존폐 문제로 혼란스럽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현행 형법이 규정하고 있는 낙태죄 항목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림으로써, 관련 법률의 개정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 초이스’(pro choice)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 즉 임신과 출산을 결정할 권한이 여성에게 있기 때문에 낙태죄를 통해 공권력이 그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반면, ‘프로 라이프’(pro life)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존엄한 것이기 때문에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낙태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습니다. 보건상의 이유, 사회 경제적인 이유,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수많은 낙태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형법에서 낙태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73년에 제정된 모자보건법에서는 5가지 경우에는 한정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1. 우생학적 혹은 유전학적인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2. 전염성 질환 3. 강간 혹은 준강간 4. 근친상간 5. 산모의 건강을 위협할 때 입니다. 한국은 낙태죄가 형법상에 엄격하게 존재하는 나라이지만, 현실은 낙태가 하루 3,000명 이상, 매년 110만 명의 태아(2017년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발표)가 살해됩니다. 매년 태어나는 신생아의 2~3배의 태아가 생명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망의 그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압도적인 낙태율 1위입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한국을 “낙태의 낙원”이라고 혹평합니다. 특별히 3회 이상 낙태 여성의 비율을 보면 불교가 32%, 개신교가 30%로 많았으며, 종교가 없는 여성은 22%로 오히려 비교적 적었다고 합니다(1991년 어느 기관의 조사). 낙태는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 의해서 이렇게 사실상 무제한 낙태가 이루어지고 있고, 낙태죄로 기소된 건이 거의 없는데도, 정부는 낙태를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법을 만드는 입법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현재 입법 예고된 것을 보면 임신 기간을 3분하고, 임신 초기(1단계)인 14주까지는 일정 사유나 상담 등 절차와 요건 없이 임신한 여성의 의사에 의해 임신 중단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낙태가 13주내에서 시행된다는 통계자료를 볼 때, 이 개정안은 결국 무제한적 낙태 허용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모에 의해서 가장 안전해야 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기를 보호할 어떤 힘도 없는 가장 작은 자를 찢어 끄집어내 버린다는 것은 문명 세계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는 생명 경시 풍조와 무분별한 성적 타락을 불러올 것입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낙태죄가 폐지된 후 낙태율이 1,000%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즉 모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의 유전인자가 형성되는 수정되는 순간부터 태아는 출생까지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밟습니다. 수정란이 배아가 되고 태아가 되고 신생아가 됩니다. 출산 후에는 누워 있다가 기어 다니고 나중에는 일어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되고, 청소년이 되고, 청장년이 되고, 마지막에 노년이 되는 것이 생명의 이치입니다. 모두 동일한 사람입니다. 어떤 비약도 없습니다. 동일한 생명의 과정입니다. 어디까지는 아직 인간이 아니고, 어디서부터는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수정된 배아는 독립된 유전자(DNA) 배열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명체입니다. 과학과 성경은 인간의 삶은 수태된 순간이란 점에서 일치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사회공리적인 입장에서 접근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논의 중인 “언제냐”(14주? 24주?)보다는 “어떻게”라는 관점의 논의가 증대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미혼모의 아이를 보호가고 양육할 것인가? 어떻게 잉태된 생명을 안전하게 출산하게 하며, 태어난 아이들이 걱정 없이 성장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산모와 아이가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사회 제도적 체제를 마련해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정부는 낙태를 합법화하는 대신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회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아름답고 건강한 성문화를 일굴 수 있도록 성과 생명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출산과 양육이 어려운 임산부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미혼모 쉘터나 장애인 돌봄, 그리고 입양 같은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여 생명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운동을 일으켜야 합니다. OECD 최저 출산율과 최고 낙태율을 보이는 우리나라는 사회 공동책임 구조로 ‘우리 아이’라는 인식하에 임산부를 보호하는 사회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여, 임신으로부터 출산과 양육까지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합니다. 낙태한 여성의 경우도 육체상의 위험부담, 정서적인 심리적 잔향이 심대합니다. 낙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낳습니다. 사회 경제적인 이유로 낙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임산부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부익부 빈익빈의 잘못된 경제 체제를 손보고, 공정한 분배 구조와 안정된 고용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책적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고 기름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각종 노동법과 보건법이 개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불가피하게 산모와 태아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할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에 철저하게 감독감찰을 해야 합니다. 지정병원을 설치하되, 그 안에 의료윤리위원회를 두고, 예외적인 상황의 불가피성을 사례별로 심의하게 해야 합니다. 낙태는 생명 경시 사상과 아동학대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공권력은 사회질서 유지 체제로서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나, 어떤 권리도 생명권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살릴 의무’는 있어도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를 죽이는 것은 인간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제하는 죄악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목회는 ‘모태에서부터 천국까지’ 삶의 전 과정을 돌보는 ‘총체적 돌봄 목회’(Total Care Ministry)가 되어야 합니다.
한기채 목사(한교총 상임회장, 기독교대한 성결교회 총회장, 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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