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균 목사
홍석균 목사

본문 : 예레미야 47장 1-7절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둘은 한참을 싸웠고 마침내 승패가 갈라졌다. 싸움에서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숙였었다. 그리고 구석으로 숨어 버렸다. 반면 이긴 수탉은 암탉을 차지하게 된 기쁨에 도취되어 높은 담장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꼬끼오~ 세상은 다 내 것이다.’ 그때 어디선가 그 소리를 들은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와 담장 위에 있던 수탉을 낚아채 가버렸다. 결국, 싸움에서 진 수탉이 얼른 암탉을 차지했다고 한다. 스포츠 세계에서 불문율처럼 여기는 것이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이 말은 경기에서 이겼다고 자만할 필요도 없고, 졌다고 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페어플레이가 중요하지 지나친 욕심을 부리거나 자만하게 되면 그 선수는 롱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과욕을 부리고 자만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을 소개하고 있다. 예레미야 46장부터 하나님은 범죄한 유다뿐 아니라 교만한 이방 나라도 하나하나 다뤄가고 있다. 이때 이런 질문이 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왜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방을 들어 사용하셔 놓고, 이제는 이방을 심판하시는가? 그에 대한 답은 마치 이런 것이다. 내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때로는 회초리로 훈육하면서 바르게 키우려고 한다. 그러면 만약 내 자식이 잘못했는데, 옆집 아줌마가 회초리로 우리 아이를 때린다면 그건 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유다를 심판하시지만 유다를 향해 괴롭히고 그 힘이 자신들에게 있는 양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도 심판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심판의 대상인 블레셋이다. 블레셋은 5개의 도시 국가로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이 연합한 “pantapolis” 즉 도시연맹체였다. 오늘날 유럽연합(EU) 같은 것으로 경제협력과 군사동맹이 가능한 연합체였다. 만약 한 도시가 공격을 받으면 다른 도시에서 즉각 경제적인 지원과 군사적인 지원을 한다. 그래서인지 블레셋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등에 업고 아브라함 시대부터 사울 왕 시대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다. 그러한 블레셋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선고를 내리시는가? 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어 그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과 그 성읍과 거기에 사는 자들을 휩쓸리니 사람들이 부르짖으며 그 땅 모든 주민이 울부짖으리라” 물이 북쪽에서 일어나 물결치는 시내를 이루었고, 그 물은 모든 성읍을 휩쓸어 사람들이 울부짖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릴 때 해변에서 모래와 조약돌과 나뭇가지로 성을 쌓는다. 자기가 만든 성이라고 나뭇잎으로 깃발도 꽂고 이름까지 적어 놓는다. 그런데 다음날 가서 보면 어떤가? 밤에 밀려온 썰물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블레셋은 자신의 힘이 있다고 으스댔을 것이다. 그들의 업적을 쌓아 올리고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다. 블레셋의 참상을 어떻게 더 말하고 있는가? 3절 “군마의 발굽 소리와 달리는 병거 바퀴가 진동하는 소리 때문에 아버지의 손맥이 풀려서 자기 자녀들을 돌보지 못하리니” 부모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을 돌본다. 그런데 바벨론의 공격이 얼마나 잔혹한지 아버지들이 손맥이 풀려서 자식들을 돌보지 못할 정도라고 말한다. 또 동맹국까지 속수무책이 된다고 말한다. 4절에 보면 당시 두로와 시돈은 블레셋과 동맹을 맺은 나라인데, 그 나라들까지 무너뜨려 블레셋을 돕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때쯤 되면 블레셋은 돌이켜야 한다. 그런데 5절에 우상숭배자들의 특징인 자해를 하면서까지 우상을 찾지만 바벨론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블레셋은 BC 604년 바벨론에게 멸망하게 된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어릴 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번은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간 적이 있었다. 카네기는 노점상에 파는 버찌를 계속 쳐다보았다. 어린 카네기가 계속 쳐다보니까 가게 주인인 할아버지가 이렇게 물었다. ‘얘야 한 움큼 가지고 가렴’ 그러나 아이는 그냥 계속 쳐다만 보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한 번 더 종용했다. ‘가져가도 괜찮다니까’ 그래도 아이는 계속 쳐다만 봤다.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는지 가져가라고 한 움큼 쥐여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물었다. ‘왜 가지고 가라 할 때 안 가지고 갔어?’ 그러자 카네기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손이 내 손보다 더 크잖아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누구인가? 자신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아는 자이다. 진정한 실력자는 누구인가? 높아졌을 때 겸손할 수 있는 자이다. 요셉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힘이 있을 때 겸손했다. 권좌에 올랐을 때 용서할 수 있었다. 부를 가졌을 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의 겸손을 훈련시키고 있다. 높은 지위를 가졌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고, 낮아져 있다고 낙심하지 말라. 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신뢰하는 것이다. 지금의 어려운 시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하나님께 겸손하므로 한결같은 인생,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인생이 되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홍석균 #홍석균목사 #한성교회 #청년부설교 #대학청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