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2019년 남북통일문제를 놓고 학자들이 발표하는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 ‘분쟁해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이 세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산 분배의 뜻을 남기고 죽었다. 맏아들은 유산의 2분의 1을, 둘째 아들은 3분의 1을, 막내 아들은 9분의 1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가 남긴 재산이란 소 열일곱 마리였다.

[2] 그 아버지는 그 소들을 나누되 죽이지 말고 산 채로 나누어 가지라는 말 한 마디를 유언에 덧붙였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소를 분배하려던 아들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계산을 해보니 맏아들의 몫은 열일곱 마리의 2분의 1이니까 여덟 마리 반이다. 둘째 아들의 몫은 열일곱 마리의 3분의 1이니 여섯 마리에 못 미치는 5.666...마리다.

[3] 막내 아들의 몫은 열일곱 마리의 9분의 1이니까 두 마리에서 조금 부족한 1.888... 마리다. 아버지가 죽이지 말고 산 채로 나누라 했으니 소를 잡아 정육점에 가서 근수를 달아 정확하게 나눌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소수점 이하를 떼고 반 내림해서 자기 몫을 가질 뜻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신경전을 벌이며 골머리를 앓던 그들은 할 수 없이 마을의 지혜 있는 어른을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4]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어른이 그들의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었다. 그 어른은 자기에게 있는 소 한 마리를 열일곱 마리에 보태서 열여덟 마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맏아들에게는 열여덟 마리의 2분의 1인 9마리를, 둘째 아들에게는 열여덟 마리의 3분의 1인 6마리를, 그리고 막내아들에게는 9분의 1일 2마리를 주었다. 세 아들 모두 아버지가 정해준 몫에서 반올림해서 더 받은 것이다.

[5] 그런데 세 아들이 각각 받은 아홉 마리, 여섯 마리, 두 마리를 합하면 열일곱 마리다. 한 마리가 남은 것이다. 그 마을 어른은 빙그레 웃으며 “한 마리 남았는데 이건 원래 내 것이니 내가 도로 가져야지”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해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이야기가 혹시 신기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2분의 1과 3분의 1과 9분의 1을 합치면 1일 될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6] 그런데 그 합계가 실제로는 1보다 적은 18분의 17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 아들이 자기들에게 정해진 몫을 모두 반올림해서 가질 수 있는 18분의 1이라는 여유분이 있었던 것이다. 세 아들에게 주어진 몫에서 소수점 이하를 다 떼면 여덟 마리, 다섯 마리, 한 마리다. 그걸 합치면 열네 마리다. 그러니까 세 마리가 남는 것이고, 세 명 모두 한 마리씩 더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7] 그런데 왜 세 형제는 그렇게 잘 분배될 것을 가지고 골머리를 앓았던 것인가? 거기서 수학의 문제가 아닌 그 세 형제들의 마음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세 형제는 모두 다른 두 형제가 반올림해서 가지면 “내가 손해를 볼 것이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양보 못하겠다”는 마음이 그들 모두의 사고를 경직시켰을 것이라고 본다.

[8] 맏아들은 자기가 장남임을 내세워 동생들의 양보를 당연한 듯 요구했을 수 있다. 둘째 아들은 형이 제일 많이 받았으니 형이 양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을 수 있다. 막내는 자기가 제일 조금 받았으니 형들이 양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그러니 해결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안 싸워도 될 일인데 남에 대한 배려심이 없고 자기 우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다보니 형제간의 우의까지 깨질 뻔했던 것이다.

[9] 맏아들이 “얘들아, 내가 제일 많이 받았으니 내가 양보하마!”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둘째가, “형님, 우리는 여러 마리 받았으니 막내가 더 갖게 합시다!”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막내가 “형님들, 아버지 살아계실 때 형님들이 아버지 일을 많이 도우셨으니 형님들이 더 가지셔야죠. 저는 한 일도 없는 데요 뭐!”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차피 모두가 다 자기 몫에서 반올림해서 더 가질 수 있도록 아버지가 분배해주셨는데 말이다.

[10]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중대한 선택의 우선권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카이기에 자신이 우선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도 양보했다. 힘든 일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크리스천들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찌 이럴 수 있었을까? 어디를 선택하든 하나님이 자신에게 이미 큰 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11] 이게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신실한 약속만을 굳게 믿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를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초조와 긴장과 불안 속에 살 이유가 없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장차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복들이 예비 되어 있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은 양보와 배려와 희생의 넓고 여유 있는 마음을 갖고 살 수 있다.

[12] 모든 크리스천들이 이런 자세로만 산다면 개독교라 손가락질 받을 이유가 있을까? 우리가 용서와 배려와 양보와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롭게 변화되겠는가? 겨레의 명절 추석을 맞으면서 오늘 나부터 아브라함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면서 배려와 양보와 섬김의 삶을 확실히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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