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히브리서 12장 18-29절
성경이 우리에게 진리와 계시를 전달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때로는 첫째는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와 같으니”(마 13:31)라고 하여 비유를 통해 진리를 전하셨다. 둘째는 복선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요셉이 형들에게 꿈을 말할 때 형들은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 야곱은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 37:11)라고 했다. 모두가 요셉의 꿈을 무시했지만 그 말을 간직한 야곱의 반응을 통해 꿈의 성취를 암시한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이 있는데, 대조이다. 이 방식은 A와 B를 대조하면서 강조하고자 하는 대상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알곡과 가라지, 빛과 어둠, 양의 무리와 염소의 무리를 대조시킨다. 히브리서를 보더라도 계속적으로 대조의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제사와 더 좋은 제사, 제물과 더 좋은 제물, 제사장과 더 좋은 제사장을 대조시켰다. 오늘 결론부에 와서도 저자는 A가 아니라 B라는 구조를 통해 B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A는 무엇인가? 18-19절에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 이 사건은 구약의 “시내산”을 말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고 제일 먼저 도착했던 곳이 시내 산이었다. 그때 모습을 출 19장 16절에는 이렇게 묘사한다. “셋째 날 아침에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그 산은 두려움이 압도하고 있었다. 죄 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에 너무나 두려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본문에서 저자가 시내 산을 설명하면서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들이 시내 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19절) 그리고 곧바로 대조적인 B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22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온 산은 어디를 말하는가? 두 가지 해석이 있는데, 첫째는 다윗이 요새를 점령한 뒤 세운 실제적인 성을 말한다. 둘째는 상징적인 의미의 산이다. 실제 있는 산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24절에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신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다.
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대상이 예수그리스도인가? 저자가 비교하고 있는 아벨의 피에 대조하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벨의 피는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아벨의 피는 원한의 피를 말하고 보복의 피를 말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벨은 불의하게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때 그 피는 원한이 쌓여 있었다. 반대로 예수의 피는 용서와 자비의 피를 말한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예수가 죄인들에게 발길질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는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셨다. 왜인가? 그분이 흘리신 피는 용서의 피였고 자비의 피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산에서 생명의 산으로, 저주의 산에서 축복의 산으로 옮겨진 자임을 믿으시길 바란다.
그러므로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시온 산의 신앙을 누리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로마의 박해 가운데 무엇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은 너희가 시온 산에 있는 자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의 두려움이 가득한 시내 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함과 평화를 얻은 시온의 백성이 되라는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많은 고난과 시험은 있다. 이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인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시내 산의 신앙이 아니라 참 생명이 있는 시온 산의 신앙이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내 산에서 머물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이 있었다. 늘 두려움을 안고 신앙생활 한다. 갑자기 우환이 찾아오면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좋은 날이 계속되면 언제가 다시 벌을 내릴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그분의 신앙생활은 늘 눌림의 연속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날 때 눌림에서 누림으로 변화된다. 시내 산의 눌림에서 시온 산의 누림으로 넘어오시길 바란다. 신앙의 연수를 자랑하지 말고 신앙의 진수를 누리시길 축복한다. 과거의 간증을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삶의 행복을 노래하시길 축복한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시온 산의 신앙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무엇인가? 바로 기쁨이다. 29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 성도의 삶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업적을 쌓고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신앙인은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기쁨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섬김이 율법주의나 공로주의로 변질 될 수밖에 없다.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한다. 헌신의 자리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시온 산의 신앙으로 증명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점점 더 위협하는 시대에 과거 하나님을 두려움의 신앙에서 기쁨의 신앙으로 오늘도 넉넉히 이겨내시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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