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아모스 5장 14-27절
한 어린 소년이 “나는 골리앗과 같다. 내 키는 9척이다”라고 떠들어 댔다. 그의 엄마가 어처구니가 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하고 묻자, 그 아이는 “글쎄요, 내가 만든 자로 키를 재어봤더니 9척이나 되던 걸요”라고 대답했다. 성공의 관건은 바른 기준을 잡는 데서 비롯된다. 100미터 달리기를 아무리 빨리 달려 해도 출발선 앞에서 출발했다면 실격이 되고 만다. 공을 아무리 정확하게 골대에 넣어도 상대의 골대가 아닌 자신의 골대였다면 실점이 되고 만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잘못된 신앙적 기준을 잡고 있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히 여호와의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이방나라에게는 멸망의 날이요, 이스라엘에는 승리의 날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을 기다라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화를 선포하셨다.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고, 또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리는 것과 같은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18-19절)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 왜 심판의 날이었던 것인가? 그것은 선의 기준은 잘못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의 기준을 “형식적 신앙”에 있었다. 형식적 신앙에 대표격이 바로 “제사”였는데, 그들은 매일 같이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을 제단에 바쳤었다. 제사는 점점 화려해졌고 사람들은 늘어나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들은 제사는 형식화되었고 화석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거룩을 외쳤지만 종교적 행위에 가까웠고 기도는 주문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여도 실상은 정의를 짓밟고, 가난한 자들을 착취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14-15절)며 참된 선을 거듭 외치신 것이다.
신앙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내용이 바뀌지 않는 신앙은 선이 아니라 악이다. 오늘날 교회의 아픔은 사람들이 개종은 했지만 회심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한다. 신앙이 있다고 하지만 삶은 여전히 세상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기도는 인간의 뜻을 관철하는 도구이고, 뭔가를 소유하려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참된 회심은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라고 외친 것이다. 여러분에게 선은 무엇인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는 것인가? 모든 공 예배를 참석하시는 것인가? 그런 경건의 습관도 필요하다. 그러나 참된 선은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진정한 선은 정의(justice)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이 정의가 민중의 해방을 위한다는 민중 신학이나 해방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로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전도를 하다 보면 정말 인품도 좋고 마음도 선한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어떤 분은 아내를 매주 교회 앞까지 바래다주면서, 절대 교회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는다. 잠깐 카페에서 차만 마실지언정 예배당 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분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다. 과거 돈을 떼먹고 도망간 거래처 사장이 교회 장로였다는 것이다. 또 회사에 부도위기가 있어 밤낮으로 일해 살려 보려고 했는데, 집사라는 사장은 맡은 일은 안 하고 사무실에서 찬송만 부르며 하나님이 부도를 막아주실 거라고 호언장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행동이 오히려 교회에 마음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거리에 나앉았는데, 아무런 사과 한마디 없었고, 오히려 사장은 가족끼리 외식하면서,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며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다. 참 신앙은 ‘고백신앙’만이 아니라 ‘생활신앙’이 되어야 한다. 예배라는 형식만 있어서 안 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반대로 또 다른 한 집사님이 계신다. 그분은 사업을 하시는데, 정말 직장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뿐 아니라 남보다 먼저 출군해서 사무실 청소도 하고 힘들어하는 동료들에게 상담도 해주고, 자녀들까지 챙긴다. 그래서 그 집사님에 물었다. 이제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 골프도 치시고 여유를 가지셔도 되지 않느냐고,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남을 위해 산다고 누가 알아 주냐고…. 그러자 그분의 대답은 ‘제 밑에 있는 직원을 생각하면 열심히 안 할 수 없잖아요.’이었다. 그 집사님은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이 회사가 잘 되면 나도 행복하지만 직원들이 행복해지고 또 그들의 가족이 행복할 것을 생각하니 더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이 회사가 잘 못되면 그들의 가족들이 힘들어진다는 생각을 하니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분이 너무 귀하게 보였다. 크리스천의 저력은 이곳에서 예배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정의가 물같이 공의가 강같이 흐르게 하는 분명한 사회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섬기며 나가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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