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많은 분들이 관람을 했거나 적어도 한 번쯤은 들어서 그 내용을 조금이라도 다 알고 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Saving Private Ryan)라는 영화가 있다. 미국행정부가 라이언이라는, 전쟁에 참여한 한 병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지옥의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여덟 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또다시 죽음의 전장으로 보낸다. 상관의 지휘에 따라 일곱 명의 군인들은 ‘한 명을 위해 왜 여덟 명이 희생되어야 하느냐?’고 불평을 토로하지만, 명령을 거부하지 않고 총탄과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로 간다.

[2] 치열한 전투에서 마침내 그들은 라이언 일병은 살리고 자신들은 모두 다 장렬하게 전사를 하는 내용이다. 국가가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그보다 많은 생명을 희생시킬 수 있음에도 마침내 그를 살려 그의 어머니에게로 귀환시킨다. 미국 당국의 놀라운 용단에 이 영화를 보는 모든 사람은 감격과 눈물로 큰 박수를 보냈다. 여덟 명이란 소중한 다수가 희생될 가능성이 아주 많은 상황에서도 한 명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다수를 죽음의 전쟁터로 보낸다.

[3] 상부의 지시자들에게 왜 고민이 없었겠는가? 갈등과 여러 가지 견해들이 많았을 게다. 그러나 마침내 이해할 수 없는 계산법을 적용시키는 결정을 내렸다. 희생될 대원들의 불평이 적지 않았다. “도대체 1명을 위해 여덟 명이 희생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들에게만 어머니가 있고 우리에겐 어머니가 없는가요?”라며 소리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국의 명령에 불복하지 않았다.

[4] 순종으로 최선을 다하다가 마침내 라이언 일병을 만나 그를 살려내고 자신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영화로 지켜보는 우리에겐 너무나 감동이 되는 이야기지만, 죽은 대원들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한 명 때문에 모두 죽은 여덟 명의 남은 유족이라 한 번 생각해보라.

[5] 한 생명이 귀한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 한 생명에 결코 뒤지지 않은 여덟 명이나 되는 많은 생명이 한 생명 때문에 다 죽어야 한다 생각해보라. 억지 중에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을까? 바보 중에 이처럼 바보 같은 결정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러 대위와 소대원들은 명령에 복종하여 마침내 장렬한 죽음으로써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 여기에 우리의 풀리지 않는 의문과 숙제가 있다.

[6] 그런데 오늘 이와 아주 흡사한 사건이 성경 속에도 나타나 있음을 아는가? 매우 유사한 내용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연결시켜 제시한 필자의 설교 서론이다. 99:1과 8:1이란 비율과 함께 그 내용이 주는 메시지와 교훈은 동일하다. 말이 안 되는 산술법에다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7] 정말로 손해 보는 ‘구출작전’(Saving Private Ryan & Saving Lost Lamb)이 장엄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유가 뭔가? ‘가족과 혈통'(family line) 때문이다. 유대인 감독 스필버그는 그것을 주제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전쟁에 출전하여 이미 두 명의 형제가 전사한 한 어머니에게 남은 막내아들의 전사소식마저 전해줘야 할 특권은 없었던 것이다.

[8] 조국을 위해 두 명의 자식을 희생시킨 가계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이 이 영화의 주제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의 비유도 가족과 혈통을 주제로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다. 몹쓸 양이지만 그 양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기 위해 오신 목자가 예수님이 아니던가. ‘자녀와 형제와 신부’란 가계(family line)의 의미가 아니고선 결코 해석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너무도 흡사한 주제와 교훈을 갖고 있는 이런 영화를 설교에 꼭 활용해보라.

[9] 수년 전 <300>이란 영화가 나와 공전의 히트를 친 적이 있다. 300명의 스파르탄 전사와 100만 명의 페르시안 제국군의 전투가 벌어지는 스케일이 큰 영화였다. 100만 대군과 맞서는 무모한 싸움, 그러나 스파르타의 위대한 용사의 희생은 결코 헛수고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영화를 보노라면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300용사’가 떠올라야 정상이다. 그 본문으로 설교할 때 <300>이란 영화를 어찌 참조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10] 2007년, 칸 국제 영화제에서 우리나라 여배우 전도연 씨가 <밀양>이라는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영화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애’라는 여자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아들과 함께 내려가는 데, 거기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만나게 된다. <밀양>을 보면, 신애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는 눈물(회개)이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1]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야 하겠지만, 해를 끼친 상대방에 대한 미안하고 아파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시편 51편에 나오는 다윗의 처절한 회개 기도와 같은 진지한 회개 없는 용서와 값싼 믿음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져주는 도전과 깨우침이 무엇인지를 <밀양>을 통해서 들춰낼 수 있어야 한다.

[12] 내가 알기로, 이동원 목사 같은 대가들의 설교 속에 이미 이 영화가 소개된 바 있다. 오래 전 나는 한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아주 신선하고도 기억에 남는 설교의 내용과 방식이었다. 우리나라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던 <바보>란 영화가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님을 다 여의고 여동생과 홀로 남은 승룡이는 바보였다. 그래도 토스트 가게를 하며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다가 어느 날 깡패들의 실수로 친구 승수 대신 죽게 되는 가슴 아픈 스토리이다.

[13] 그는 죽어갔지만 그로 인해 동생의 차가운 마음도 풀어주고, 초등학교 친구인 승수와 첫 사랑 지수의 마음의 병도 치유하게 해준다. 참으로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는 아주 슬픈 영화였다. 김 목사는 이 영화를 조금씩 보여주면서 중간에 설명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설교를 했다. 일단은 영화 자체가 주는 비주얼의 위력과 스토리의 애절함이 한데 어우러져, 청중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고 콧날을 시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14] 설교자가 할 일은 긴 영화를 다 보여줄 수 없으니 5분간의 시청 후 중간에 덜 중요한 부분은 간단한 설명으로 보충하고, 또 5분 간의 영화시청 후 설명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그 설교의 압권은 영화가 다 끝난 직후 제시된 결론 부분에 있었다. 그 설교는 다음과 같이 매듭지어진다. 승룡이는 바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냥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15] 그가 희생됨으로 차가운 동생의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었고, 그간 마음의 병으로 무거운 가슴을 안고 살아가던 두 친구의 병도 고쳐주었다. 그런 그를 누가 바보라 하겠는가? 여기 진정한 바보가 한 분 계신다. 2천 년 전 그 바보는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다. 우리 모두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과 문제를 해결해주시려고 죄 많은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진정 바보셨다. 그런데 누가 그분을 바보라 하겠는가?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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