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장 해석의 딜레마를 다루면서 이 창조 계시의 해석 자체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추적하였다.
먼저 인류는 창세기 1장 해석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세 가지 사건을 역사 속에서 겪었음을 논증하였다. 즉 인류의 타락과 에덴동산 추방 사건에 따른 우주적 붕괴(죽음과 저주로 대표되는 우주적 재앙)가 첫째요, 둘째는 지구촌 생태환경의 일대 대 격변을 초래한 창세기 대홍수 사건(창 6-9장)으로 이 재앙이 에덴동산과 홍수 이전 지구촌 환경의 모습을 재현 불가능하도록 그 흔적 자체를 제거해버린 것이요, 마지막으로 대홍수 이후 바벨탑에서 일어난 인류 언어 혼잡 사건이 그것이었다.
바벨탑에서의 언어 혼잡은 인류의 진정한 의미의 언어적 일치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진리를 바르게 전하는 일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렸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정(情)이나 한(恨) 같은 언어를 다른 민족의 언어로 번역은 할 수 있더라도 한민족이 아니라면 그 절실하고 내밀한 뉘앙스를 실제적으로 체득하기란 쉽지 않다.
즉 언어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언어가 게임과 마찬가지로 가족유사성을 가진다해도 그 공통된 본질은 없으며(모르며) 단지 개별적 언어가 가진 규칙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영국에서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의 철학 겸손화 운동이 일어난 것도 바로 이 같은 철학이 부딪힌 한계를 절감한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 문자와 언어도 제대로 지니지 못했던 애굽 속 노예 민족의 지도자 모세에게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초월의 창조 계시(창세기 창조 계시)를 어떻게 내재의 인간이 명료하고 간결하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과학시대가 되었으니 첨단과학으로 접근하면 될 것 아닌가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과학 시대의 인류에게만 계시한 책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수천 년 동안 과학적 접근을 지속했다면 창세기 1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석적 누더기 책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설령 이 같은 딜레마가 해결되더라도 정말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또한 기다리고 있다. 바로 창조 계시는 단순한 유일신의 초월 계시가 아니요 삼위일체의 창조 계시요 타락과 구속과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까지 내다 본 계시라는 점이다. 이것을 교회 역사 속 주요 신학자들(오리겐과 칼빈)의 창조 해석 방식을 통해 논증하였다. 그들은 과학 없이도 창세기 해석에 바른 해석 방식을 제공하였고 지금도 그 방식은 교회사 속에서 유효하다. 교회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 본질상, 창세기 해석에 있어 삼위일체의 창조 계시와 타락과 구속과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의 계시라는 측면에서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치명적 한계를 노정(露呈)할 수밖에 없다. 즉 반증(反證) 가능한 한계를 가진 과학은 반증을 거부하는 초월을 해석하기에는 치명적 한계를 가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께서 말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든 해석하려들고 외삽(外揷)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창조의 초월 사건을 내재적 과학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든 왈가왈부하고 싶어 한다. 그럴 경우 교회는 늘 세속 과학에게 밀려온 것이 역사였다.
바른 해석보다 성급하고 잘못된 적용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해온 것이다. 즉 성경이 문제가 아니라 바른 성경 해석의 문제였다. 이 딜레마 속에서 필자는 몇 가지 제언을 하면서 본고를 마치려 한다.
첫째, 창세기 1장의 바른 해석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우주적 타락, 지구적 대격변, 언어적 혼란, 영적 분별력 상실이 분명하게 있었음을 인식하고 해석에 있어서 남을 설득하기 어려운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말고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부분에는 자유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탁월한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일치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내 주장만을 고집하기보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경청하고 연구하고 참 된 해석의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성경 계시를 받은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하나님의 성경 계시 속에는 인간이 채울 수 없는 빈틈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침쭘(Tzimtzum)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침쭘(Tzimtzum)은 히브리어로 ‘축소’라는 개념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마치 스스로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자체 모순처럼 여겨지는 일을 한다. 창조주는 때로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주고 자신은 물러나 있다. 이것이 바로 침쭘이다. 마치 성경 아가서에 하나님은 언급되지 않으나 아가서는 역설적으로 대단히 성스러운 책이다. 아가서에서 하나님은 숨겨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세상의 모호함이나 부조리는 바로 이런 침쭘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면서 왜 세상은 온통 부조리 투성이인가. 이것을 영지주의자들은 우주 창조주의 한계에서 찾으려 하고 유대인들은 침쭘에서 찾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도 침쭘으로 설명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자신을 축소하고 자기를 제한(self-limitation)한다. 물론 창조주가 마냥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때에 창조주는 분명히 개입하여 흐름을 바로 잡는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이 피조 세계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질문한다. 슬픔과 기쁨은 왜 함께 공존하는가. 질서와 부조리와 불합리가 왜 함께 공존하는 것인가. 신이 있다면 왜 죄악을 방치하였을까? 왜 창조주는 빛도 만들도 어두움도 만들고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키는가(사 45:7).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이 바로 그런 모순되어 보이는 모든 일을 한다고 말한다. 하물며 인간은 목격도 측량도 할 수 없는 창조 계시는 어떻겠나.
둘째, 성경은 계시이지만 과학책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대 과학의 방법론이나 성과를 내세우면서 창세기 1장 해석의 “과학적 제사장”이나 “과학적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인식해야 한다. 창조 신앙에 담긴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여 비본질적인 것을 구원의 본질처럼 설명하려들거나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부분을 외삽(外揷)하여 단정 짓는 성급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주면 안 된다.
다만 우리가 혹시 과학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진지하고 바른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비록 성경이 과학책은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므로 진정한 과학도 결국은 성경적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열린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두 권의 책(성경과 자연)은 놀라운 화목과 융합을 이루는 경우가 필연코 도래할 것이라 본다. 그날을 바라보며 두 권의 책을 진지하고 겸손하게 연구하며 귀하게 여기자.
마지막으로 “창조”와 관련하여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연구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 가운데 겸손해야 한다(벧전 3:15-16). 피조물인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상에 대해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을 명심하고 창조 신앙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공격적으로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간은 특별 은총(구속)과 자연 은총(자연과 과학) 앞에서 여전히 허물투성이의 지극히 작은 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것들도 언젠가 거울을 마주 보듯 깨달을 수 있는 그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위엄’(Magnalia Dei)을 담대히 전하자! -끝-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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