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얼마나 놀랍고 감격할 일인가?
더구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다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눈을 뜨게 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전 할 것이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아쉽게도 이런 감격의 장면을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의 시비 거리만 기록 되어 있다.
이들은 예수님의 기적에 놀라고 감격하기에 앞서 "네가 진짜 나은 것이냐? 왜 하필 안식일에 소경의 눈을 뜨게 했느냐?" 안식일을 어긴 것을 보니 이런 일 한 예수는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죄인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 등으로 떠들고 있다.
눈을 뜨게 한 분이 누구 인지도 알지 못하고 율법주의에만 관심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불쌍하게 여길 뿐이다. 참된 신앙은 이런 신앙은 이런 시비의 신앙에서 벗어나 주님을 가슴에 모신 감격의 생활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바리새인과 같은 성경의 문자 주의와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감격의 신앙에서 벗어나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인한 기쁜 감격과 감사가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은 놀라움과 감격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놀라움이요, 하나님이 이 땅에 33년간 사셨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요, 십자가에 달려 우리대신 십자가를 지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는 자체가 감격의 연속인 것이다. 이를 더욱 확실히 보장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 또한 감격이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재림주로 오시는 것과 교회를 세우시고, 66권 말씀의 약속을 주시고, 이 말씀을 통해 만나를 먹이시기 위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이는 주의 종을 세워 일하시는 그 자체가 또한 감격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놀라움과 감격이 없나? 혹시 오늘 우리도 주님 주변에서 바리새인 같이 시지비조로 종교인으로 타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이런 종교인으로 타락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급강한 바람과 불길같이 타 오름으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던 성령을 보내셨다.
그가 나를 증거 하게하실 것이요(요15장26절)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만약에 성령을 모시되 전혀 기도에 힘쓰던 초대교회 성도와 사도들처럼 놀라움과 감격에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주님의 사랑에 황홀하고 놀라며, 감격을 경험하게 되어 질 것이다.
저는 은퇴 후 다문화 센터를 설립하여 운영하며, 교회를 설립하여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피곤하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마른 막대기 같은 자를 택하여 주님께 적게나마 쓰임 받게 된 것을 생각하면, 감격 할 뿐이다.
그럴 때 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저를 붙드시고, 나에게 은밀한 위로와 평화를 주심으로 황홀한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이 있기에 기쁘게 감당하고 있다.
미국의 욕 중에 "성령 안 받고 목사나 해 먹어라."는 욕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디 목사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성령 충만한 감격을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특정 신앙인들의 전유물로 생각하면 오해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뇌가 오른 쪽 뇌와 왼쪽 뇌로 되었는데, 오른 쪽 뇌는 황홀한 감격을 추구하고, 왼쪽 뇌는 이성과 질서를 추구 한다"고 말한다.
논리와 이성만을 추구하는 왼쪽 뇌의 편향에서 벗어나, 오른쪽 뇌도 만족시켜 주어야만 정상적인 인간, 정상적인 자녀 교육, 정상적인 부부의 삶이 가능 하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의 해결도 그렇습니다. 독일은 19세기 초에 망했을 때 피히테가 '독일 민족에게 고함' 이라는 글에서 독일 민족은 감성이 예민하고 감격할 줄 아는 민족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므로 독일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지금 나라가 우 쪽과 좌 쪽이 갈라져서 심각한 진통을 격고 있다. 증오와 국론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왼쪽 뇌에만 몰입되면 나라의 운명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제 오른쪽 뇌에 치우쳐 있다면 왼쪽으로, 왼쪽으로 치우 쳤으면 우 쪽을 보충해야 한다. 그러할 때 민족의 미래가 밝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제 너무 치우친 논리에서 벗어 날 때 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의존적 단계 please help me, 둘째 독립적 단계 I can take care my self, 셋째는 봉사적 단계 please lett help you로 나아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단계 그리고 예수 믿고 확신을 가지는 단계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단계이다. 그런데 이 소경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게 되면 그 신앙은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격의 신앙을 누리려면 첫째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맹인도 얼마나 부모를 원망하고 절망 속에 살아 왔겠는가? 생각하건데 자살 할 생각도 여러 번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를 만났다.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삭개오는 여리고 뽕나무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되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의심을 풀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바울이 되어 위대한 복음의 증거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 즉 체험인 것이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보지 못하던 내가 보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감격스럽겠는가?
그렇다.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감격의 눈물과 생의 벅찬 감격이다. 또한 자기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된다. 나를 고쳐 주신 그분을 만나 볼 수 없을까? 어떻게 이 은혜를 갚을까 생각 했을 것이다. 자기가 눈을 뜨게 된 것을 생각하면서 찬송과 영광을 돌렸을 것이다. 그 후에 그는 자기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거 했다. 나는 잘 모르나 내가 아는 것은 그 분이 내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이다.
주후 165년 로마에서 순교한 '유스티누스'란 분이 예수를 믿게 된 기록이 있다. 그가 쟁쟁한 청년 시절에 한번은 에베소에서 해변을 산책하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예수에 관해 말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 노인의 말을 듣던 그는 갑자기 감동으로 뜨거워지고 회개하여, 그때부터 주님께 헌신하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경은 일평생 소경 되었다가 갑자기 세상을 보게 되니까 이웃사람과 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 소경은 두 눈을 뜨게 되자 자기 자신의 확실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놀라운 변화의 기쁨 즉 감격이다. 이 감격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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