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제15> : 자유 의지는 죄가 없는 순수한 상태(a state of innocene) 안에서도 남아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자유의지는 능동적 능력 (active capacity) 이 아닌, 오직 수동적 능력(passive capacity) 안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
"명제집의 대가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는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증거들에 의해, 인간은 창조되었을 때 의로운 본성과 선한 의지를 받았고, 인간이 승리 할 수 있기 위한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입증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자신의 실수 때문에는 타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롬바르드는 능동적 능력을 말하는데, 이것은 어거스틴의 저서 『정정과 은총에 관하여』"(De Correptione et Gratia) 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견해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인간이 만일 의지력을 발취한다면, 그는 '행하기 위한 능력'(ability to act)을 갖지만, '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의지를 갖는 것은 아니다 (will by means of which he could)." 여기서 어거스틴은 '행하는 능력'을 수동적 능력(passive capacity)으로, 그리고 '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의지를 능동적 능력(active capacity)으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바르트에 의한 이러한 구분은 두 번째 장에서 좀더 명확하게 된다."
우리는 앞선 논제 14에서 의지의 두 가지 주요 요소, 곧 '능동적 의지'와 '수동적 의지' 개념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세 스콜라 신학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은 자유 의지의 '능동적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공적을 쌓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 루터는 인간 안에는 구원에 이르는 선한 행위를 할 '능동적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루터는 죽은 자에 대한 유비를 통해, 죽은 자가 삶에 대해 오직 '수동적 의지'만을 갖는 것처럼, 타락 이후 인간은 오직 외부로부터 오는 신적인 힘에 의해서만 구원에 이르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동적 의지'에 대해 말한다.(논제 14 참조)
논제 15에서 루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타락 이전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오직 수동적 능력 안에서만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과감하게 주장한다.
종교개혁 이전 스콜라주의는 적어도 타락 전 무죄의 상태에서는 '능동적 자유의지'가 있었다고 가르쳤다. 만일 타락 이전 인간의 의지 안에 그러한 능동적 능력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아담이 타락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가질 수 있는 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스콜라 신학은 타락이 불완전한 인간을 만든 창조자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하여 타락 이전 인간 안에 '능동적 의지'가 있다고 가르쳤다.
논제 15에 대한 해설에서 루터는 이러한 스콜라 신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자로 피터 롬바르트(Peter Lombard)를 그 예로 든다.
피터 롬바르트는 스콜라 신학자로 노트르담(Notre Dame) 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명제집』 (Book of Sentences) 을 저술했다. 롬바르트는 이 저술을 통해 신학자로 큰 명성을 얻었고, 후에 '명제집의 대가'(Magister Sententiarum), 또는 줄여서 '대가'(Magister)라는 이름을 얻었다. 명제집은 총 4권의 책으로 일련의 긴 질문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삼위일체의 신비"(The Mystery of the Trinity)를 다루고 있고, 2권은 "창조에 대하여"(On Creation", 3권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4권은 "상징들의 교리에 대하여"(On the Doctrine of Signs)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자유의지" (liberum arbitrium)는 제 2권에서 다루어 지고 있다.
여기서 롬바르트는 타락 이전에도 인간 안에는 '능동적 자유의지'가 있었고, 인간은 이 자유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창조의 은혜'(gratia creationis)와 협력하여 어떠한 악이나 장애물에 구애 받지 않고 궁극적인 선을 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롬바르트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의 범죄로 말미암아 초자연적 은혜의 선물인 창조의 은혜가 파괴되었고, 그 결과 인간 안에 악을 향한 경향성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유의지가 어떤 필연적인 죄에 속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로 "타락 이전과 이후 의지는 어떤 필연성에 구속되지 않는다." 롬바르트는 예컨데 심지어 타락 이후 죄인들의 의지도 외부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영혼의 내적 움직임으로서, 의지는 결코 강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롬바르트를 비롯한 스콜주의 신학은 인간이 적어도 타락 이전 순전한 상태에서 자유의지의 능동적 능력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러한 능동적 능력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아담은 타락에 대해 어떻게 책임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논제 15는 자유의지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설명하려는 이러한 모든 시도 조차 거부한다. 심지어 루터는 주장하기를, 타락 이전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에서도 자유 의지는 능동적 능력이 아니라, 수동적 능력만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중세 스콜라 신학과 루터의 큰 차이가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은 타락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설명하기 위해 타락 이전 순전한 상태에서의 인간의 '능동적 자유의지'에 대해 주장한다. 반면에 루터에게 있어서 이러한 주장은 결국 인간은 자유의지로 죄를 지었고, 자유 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놓게 된다. 더구나 스콜라 신학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 타락 이전에는 창조자 하나님과는 별개로 자신의 자유 의지로 활동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루터는 타락 이전에 인간의 자유 의지는 오직 '수동적 능력'만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능동적 능력'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외적인 힘, 곧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가 없는 순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곧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에 자신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았다.
그렇다면, 루터는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어떻게 말하는가? 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셨는가? 이에 대해 루터는 두 가지로 대답한다. (Paul Althaus, The Theology of Martin Luther, p. 159) 루터의 첫 번째 대답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는 것과,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원인 제공자가 아니라는 이 두 가지 모순을 신학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 숨어 계신 하나님의 의지의 문제로 남는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위험과 신비를 분석 할 수 없고, 다만 경배할 뿐이다.(WA 18, 712)
루터의 두 번째 대답은 그것이 "축복받은 죄"(felix culpa)라는 점이다. 루터에 의하면, "만일 당신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 왜 아담이 범죄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심지어 나의 아들까지도 내어줄 만큼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함 이었다."이것은 아담에게 인류의 타락이 없었다면, 죄와 범죄함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비의 온전한 위대함을 아는 것을 경험 하지도 배우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도 맞닿아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지 않는가?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큰 사랑과 은혜를 잃어버리고 만다.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물리쳐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 분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깨달을 수 있다.
이와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왜 아담이 타락하도록 허용하셨는가? 에 대한 질문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서는 죄된 존재 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 줄 만큼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최근에 교회와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세상의 조롱과 비판이 된 지금,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목소리들이 많다. 이것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더 큰 책임성을 가지고 선을 행함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그 의미가 왜곡되어, 책임성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것이 마치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루터는 논제 1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선을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순결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한 데는 기독교인들이 그 책임성을 다 하지 못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그 감격스러운 사랑을 잃어버리고 무디어진 우리의 모습 때문은 아닐까?
■ 정진오 목사는
정진오 목사는 루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 Research Fellow와 예일 신학대학원 Visiting Scholar를 거쳐 현재 미국 시온루터교회 (LCMS) 한인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다. 연락은 전화 618-920-9311 또는 이메일(jjeong@zionbelleville.org)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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