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박용국 기자] 지난달 30일 오후5시 국제루터교회 예배당에서는 종교개혁499주년을 기념하는 한·독 연합예배가 열렸다.
행사에서는 볼커 티드만(Volker Thiedemann) 목사(재한독일교회)가 "종교개혁의 날"(롬3:21~28)이란 주제로 설교했으며, 루터교 김철환 총회장이 종교개혁 500주년 일 년 전 선포를 하고 축도했다. 다음은 '종교개혁기념 한독연합예배' 설교문 전문이다.
종교개혁 기념 한독(LCK-EGDS)연합 예배 설교(2016.10.30) - 설교본문: 로마서 3:21-28절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서울 한남동 국제루터교회에 모인 교인 여러분! 마르틴 루터 전통에 대해 의무감을 느끼는 사랑하는 모든 여성 그리고 남성 그리스도인들 여러분! 여러분들은 기독교한국루터회와 국제루터교회와 재한독일어권교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방송을 시청하시는 사랑하는 여러분들과 그리고 물론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 소속 그리스도인들께도 함께 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특별한 축제를 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1517년에 당시 교회를 비판함으로써 교회적, 사회적, 정치적 쓰나미를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전 세계를 변화시킨 용감하고 젊은 수도사이자 신학대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를 상기하는 해의 시작을 축하하고자 합니다.
독일인으로서 그리고 독일 목사로서 오늘 이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저에게 특별한 영광이며, 제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격변의 시대 속에서 분단을 맞이한 한국과 독일의 공통의 운명이 한국인과 우리 독일인들을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분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1989년의 평화 혁명은 독일인에게 하나의 기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분단은 아직 극복되지 않았고, 인류 공동체 내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북한 및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독재자를 하나님처럼 숭배하고 찬양하고 있으며, 21세기에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슬프게 합니다.
체제 뿐만 아니라 교회도 사람들을 조종하고 이용해 왔습니다. 교회가 돈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마르틴 루터의 전기 영화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루터는 교회의 탐욕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영화에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초라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불구가 된 어린 딸을 안고 망설이면서 또 무서워하면서 큰 교회로 들어갑니다. 그녀는 인쇄된 종이를 열심히 판매하고 있는 한 사제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사제는 이 증서를 사는 자는 연옥에 길게 머물지 않고 천국에 신속하게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여인은 치마 자락에 묶어 둔 동전들을 꺼내어 사제에게 줍니다. 그리고 기쁨과 안도의 마음으로 증서를 받고 서둘러 교회 밖으로 나옵니다. 교회 밖에는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있었는데 여인은 그와 충돌할 뻔 합니다. 그때 루터는 여인과 딸 앞에서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그 돈으로 차라리 당신의 딸에게 먹을 것을 사주십시오!“
루터가 옳습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통하여 이미 우리는 죄 용서를 확실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선행을 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질문해도 될까요? 여러분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여러분이 영생을 선물로 얻는 것이 여러분의 행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예라고 하셔도 저는 놀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선한 사람인지에 대해 하나님께 깊은 인상을 심어 드리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선한 행위와 돈을 통하여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게 할 수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오늘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많은 교회에서 믿음보다 돈이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기만당하고 있으며, 복음의 참 의미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언젠가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루터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공동체에 보낸 서신을 그저 읽는 것을 넘어서 바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이 거짓에 반대하여 싸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거저이며 무상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영구히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했었던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지셨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를 분리시킬 그 무엇도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 앞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믿으면 그들에게 아무런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고 이렇게 죽음과 지옥은 단지 우스꽝스러운 것일 뿐이며, 영생이 우리의 확실한 미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루터란들은 마귀를 비웃을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은혜에 대하여 마음껏 기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예배를 마치고 나면 기쁨에 가득 차서 웃으며 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불안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소망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두려움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하며, 오직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만 책임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을 그 누구의 하인도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 칭했습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사회와 문화, 전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은 특히 유교문화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전혀 자유롭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독일인인 저에게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은 특히 “학습의 노예“, “외적인 아름다움의 노예“ 그리고 “돈벌이의 노예“로 보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나쁜 점은 사람들이 부자유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자신을 노예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시대에 있다면 이 부자유를 강하게 비판하며 졸업시험 성적과 미모와 수입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 오히려 하나님을 염두에 둘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에는 학교와 대학교와 직업에서 최고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도 누구나 다 똑같이 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누구나 다 아름답습니다. 그는 수술을 통한 완벽한 미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누구나 다 귀중합니다. 출세하지 않고 호화로운 삶을 살지 않아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저는 새로운 마르틴 루터와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새로운, 사랑이 넘치는, 믿을 만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것 같습니까?
만일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의 교회를 관찰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압박과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시오. 마지막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입니다.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의 교회를 관찰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 만인사제직에 대해 말했습니다. 왜 여러분의 교회에는 아직까지도 위계질서와 심각한 불평등이 있습니까? 왜 목사에게 그렇게 많은 권력이 있고 신자들에게는 거의 없습니까? 왜 여러분의 교회에서 여성들이 여전히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까?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더 지적이고, 더 부지런하고 그리고 더 나은 교육을 받은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의 교회를 관찰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여러분들은 저로부터 500년이 지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유감스럽게도 계몽주의와 학문의 발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왜 여러분은 성경 텍스트 내에 있는 여러 갈등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옛 이야기들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과학과 학문연구를 더 많이 이용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성경 말씀이 성령을 통하여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잊었습니까?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의 교회를 관찰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많은 옛날 옛적의 노래들을 부르고 교회에서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하는 언어를 말합니까? 저는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고“ 새로운 찬송 시들을 작사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설교했습니다.
만약 마르틴 루터가 오늘날의 교회를 관찰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소리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왜 그렇게 다툼이 많습니까? 서로 화목하고 양보하고 나누는 것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 이것은 여러분이 즉시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종교개혁 없이도 여러분이 꾸밈 없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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