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한시대의 정신을 이끌었던 두 노학자가 나란히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한사람은 성리학의 꽃을 피워 나라를 지탱할 인재를 모으고 수많은 후학들을 입신양명케 한 퇴계 이 황(1501~1571)이고, 다른 한 사람은 임금과 퇴계의 수차례의 입각 요청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처사로 평생을 살면서 후학들을 양성한 남명 조 식(1501~1572년)이다.
흔히 16세기 조선의 정계와 학계는 퇴계와 율곡으로 대별된다고 알려져 있으나, 퇴계와 남명이야말로 실질적인 양대산맥이라 할 것이다. 두 사람은 동일한 시대에 같은 성리학의 관점에서 나라를 걱정하며 자신을 성찰하고 다음 세대를 열심히 준비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명의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 익의 '성호사설')이라 표현될 만큼 서로 대조되는 삶이었다. 학문과 삶과 다음세대를 향한 고민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를 역사는 우리에게 절절하게 전하고 있다.
퇴계가 관직에 나아가 승승장구하며 성리학을 집대성하는 한편, 문하생들을 많이 배출하여 '입신양명'케 하고 학파를 이루어 도산서원을 중심한 정치권의 힘있는 큰 줄기를 이루어냈다면, 남명은 지리산 변두리, 곧 경상남도(합천 김해 산청)에서 학문 연마에 힘쓰며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깊고 고요한 은자의 생활을 하였던 남명은 옷띠에는 '성성자(惺惺子)'라 이름한 방울을, 허리춤에는 자신의 학문의 중심 뜻을 담은 '경의(敬義)'를 새겨 넣은 칼을 항상 차고 다니며 자기성찰에 힘썼다. 실천과 민본에 기초한, 소박하되 깊은 생활을 통해 산천재(산청)를 중심으로 다음 세대를 튼실히 세워가는 일에 집중하였다.
남명의 나이 69세 때에는 남해안에 자주 침입하는 왜군의 침입을 우려하여 책제(策題, 어떤 일에 대해 방안을 제시하는 글)를 지어 제자들을 시험하며, 왜침에 대비할 줄 모르는 정부와 나랏일에 관심없는 관료들의 부패를 지적하는 한편, 일상 속에 실력을 쌓을 것과 힘을 길러 나라의 위기 때에는 문인이라도 앞장서서 나아가 싸워야 함을 가르쳤다.
남명 사후 20년 후 전쟁이 발발하고 불과 20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자 퇴계의 문하생들이 중심이 된 선조의 (입신양명한) 각료들은 의주까지 파천 길에 오르기에 바빴다. 같은 시기, 남명의 문하생들 곧, 곽재우(사위), 정인홍, 오 운, 김 면, 조종도, 이 로 등은 의병장으로 나서 매우 의미있는 전공을 세웠고(사실, 임진왜란 당시 문인 의병장의 대부분은 남명의 문하생이었다), 정곤수, 정 탁 등은 위기에 빠져 중심을 잡지 못하는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후 개혁성향의 광해군과 뜻을 함께 하여 신속한 전후복구, 농민과 백성의 부담을 격감시켜 준 대동법(선혜법) 실시, 동의보감 편찬 등의 민생 살리기와 유연한 실리 외교를 통한 평화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었다.
가히 남명의 삶과 혜안은 긴박한 나라 상황을 안타까워한 노년의 사무엘의 선택과 삶을 떠올리게 한다. 호시탐탐 노리는 블레셋에 의한 전운은 감돌고, 다윗을 위협하는 사울의 광기는 날이 갈수록 더하여 가고, 국론은 분열되고 백성은 두려움에 떠는 때에 민족의 스승, 사무엘은 고향 라마로 내려가 고요히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먼 미래를 내다보며, 후학들을 길러낼 '나욧'(삼상19:18, 공동체, 신학교, 대조사회, 대안학교)을 꾸려나간다. 조용한 움직임이었지만 사무엘이 왜 민족 지도자인가를 답하는 큰 울림의 선택이요, 삶이요, 가르침이다. 이 라마나욧은 다윗의 은신처, 피난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1,000년의 선지 생도들의 출발점이 되어 회복과 치유와 개혁과 갱신의 산파 역할을 든든히 행한 뿌리였던 것이다.
지난 9일 소위 99절(북한정권창건기념일)에 때를 맞추어 기습적으로 감행한 5차 핵실험 등으로 긴장 일로에 있던 한반도에 전운의 긴장감이 크다. 의아스러울 정도로 민심들은 요동치 않는다. 답이나 출구를 찾으려는 절박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권 뿐만 아니라 교계 또한 각자 자신이 선 자리의 입장만을 강변함으로 중언부언의 답을 반복적으로 견지한다.
속도와 경쟁과 성공과 입신양명과 맘몬의 힘이 주는 무감각의 시대에 떠오르는 몇몇 ...
백척간두 진일보, 우보천리(牛步千里), 우보이천리(愚步而天理),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변두리, 한 알 썩어지는 밀알, ... 먼 하늘 바라보며 홀로 중얼중얼~ 중얼거려 본다.
온 민족이 존경하여 혜안을 묻고자 찾아갈 만한 믿음의 지도자 한사람 만나기 힘든 이 즈음. 전운이 감돌던 한 가운데서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길을 사는 사표(師表)를 우리는 기다리며 기대하며 기도한다. 간절히...
섬광처럼 빛나는 주장과 교묘한 설득은 있으나, 진심을 처절하되 묵묵히 살아내는 삶이 희귀한 시대에 살며 그가 그립다. 그들이 그립다.
하나 되자, 한 몸 이루자, 준비하자 외치고 설득하기 전에, 한 변두리에서라도 새터민 하나라도 마주잡고 느긋하게 더불어 살아볼 일이다.
/글·사진=평통기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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