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이수민 기자] 한국기독언론협회가 9일 오후 2시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제16회 기독언론포럼'을 개최한 가운데, 다소 민감한 사안인 '이단/사이비'를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다음은 제1발제자로 나선 강희창 박사(서울장신대 겸임교수)의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 발표 전문이다.
I. 그리스도론의 진술 방식 : '계시'와 '합리적 논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땅 위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시는 동안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 죄인에 대한 죄 사함이나 구원은 하나님만의 일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 아니신데,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사신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두 '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공통된 신성의 끈으로 묶여 있지만,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 그래서 "말씀이 성육신되셨으나 아직 높은 곳에 계시네!" 라고 찬양하기도 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시는 하나님'은 한분이시며 동일하시다. 그러면서도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가 아니시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를 피조세계의 합리적 논리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오순절에 충만하게 임하사 믿는 자들의 공동체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이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 속에서 담당하신 역할과 '관계 속에서의 개별성'을 표현하려는 것이 삼위일체에서 '위격'(person)이 의도하는 바이다. 그러한 의도와 배경을 전제하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oneness)와 '셋'(threeness)의 관계를 합리적 이성의 논증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성경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삼위일체적인 구원역사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계시'라고 한다면, 인간 이성의 논증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다. 성경은 '자신이 삼위일체적으로, 계시적으로 이해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구원자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는 누구라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정통 기독론은 그런 방식으로 구원론적으로 기술된다. 그것이 곧 니케아공의회의 방식이요 아타나시우스의 방식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는 그 분의 구원활동 속에서, 구원역사를 통하여 알려졌다. 믿음은, 성령을 도우심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구원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인 것이다.
II. 니케아신조(A.D.381)와 칼세돈 신조(A.D.451)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의 전통에 있어서 니케아 신조(A.D.381)와 칼세돈 신조(A.D.451)가 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을 재진술한 내용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무조건적이고 항구적인 기독교 진리로 여겨져 온 것이다.
A.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A.D. 381)1)
우리는 한분 하나님을 믿는다. 그 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시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빛으로부터 오신 빛이시오, 참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셨기 때문에 아버지와 본질이 동일하시다.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성육신하시고, 인간이 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받으시며 장사지낸 바 되셨다. 그리고 그는 성경대로 사흘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이요 그의 나라는 영원무궁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한 예배와 영광을 받으신다. 이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또한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하나의 세례만을 인정한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 임할 세상에서의 영생을 바라본다.
B. 칼세돈신조(A.D. 451)
거룩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본받아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르치는 바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동일하신 분은 신성에 있어서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완전하시며,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셨다. 그는 신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동일 본질이시지만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으시다. 그는 신성에 관한 한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시고, 그의 인성에 관하여는 이 동일하신 분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이 마리아는 인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 이 동일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님이시요, 독생자이시며, 우리에게 두 본성으로 되어 있으심이 알려진 바, 이 두 본성은 혼돈이 없고, 변화도 없으며, 분리될 수도 없고, 동떨어질 수도 없다. 그런데 이 두 본성의 차이는 이 연합으로 인해서 결코 없어질 수 없으며, 각 본성의 속성들은 한 위격과 한 본체(one hypostasis) 안에서 둘 다 보존되고 함께 역사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실 수 없다. 이 분은 동일하신 아들이시요, 독생자이시요, 하나님의 로고스(말씀)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에 관하여는 일찍이 예언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요, 교부들의 신조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이다.
이상의 두 신조(信條)에 나타난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이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요. 성경해석의 결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요, 기독교 정통 교리의 두 기둥이자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III. 성서적 문자주의
A. 문자주의
니케아 신조와 칼세돈 신조를 복음의 중심으로, 성경해석의 열쇠요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별 관심없이, 성서의 문자(文字)와 구절(句節)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 한국교회 신앙생활의 습관과 전통처럼 여겨져 왔다.
문자와 구절에 충실하면서 소신있게 자신의 입장을 밝혀나간 지도자들은 그 입장을 밀고나가서 새로운 교파를 만들고 부흥성장하기도 했다. 그런 지도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문자적 해석과 영적 체험들이 나름대로의 교파적 다양성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성서적 문자주의는 결국 교파 분열을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고, 그 문자주의와 합리화는 교파마다의 독선적 신앙이 되기도 했다.
성서의 문자와 구절은 소중하다. 그런데 성서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대로 해석될 때 그러하다. 그러니까 성경 해석의 열쇠요 결과로서의 기독교 전통(Tradition)은 필수요소가 되는 것이다.
B. 환원주의(Reductionism)
병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분석적인 진단과 치료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경계선을 넘어서는 범위까지 인간이 분석 환원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진리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의도에서 분석과 환원을 추구할 경우, 분석과 환원이 진행되는 어느 지점에서 정체성의 소멸 내지는 전환 과정을 겪게 될 수 있다.
성경 말씀 전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할 때,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간에 성경 구절 모두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특정 구절들을 모아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이다"라고 주장할 때, 정체성의 전환 내지는 왜곡의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성서적 문자주의는 어느 극단에서 그런 위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분석하고 환원하면서 내가 찾아낸 길로 나아갈 때, 정체성의 전환과 왜곡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그러한 문자주의적 방황이 한국 교회 이단의 출발지점이 되거나 중간 단계의 합리화가 된 증거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분석과 환원 그리고 문자주의적 방식'으로부터 '니케아 신조와 칼세돈 신조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성서적 복음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변화'가 요청된다. 문자와 구절이 올바로 쓰임받게 하려면 그러니까 올바른 성서적 문자주의가 되려면 그러한 변화가 요청되는 것이다.
IV. 이단 판정의 전근대성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안디옥의 제자들은 율법주의 문제로 회의를 열었다. 이른 바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그 회의의 갈등과 논쟁과 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복음은 본격적인 유럽 선교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A.D. 313년의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제국에 받아들여진 기독교는 10여년 후 A.D. 325년에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게 된다. 아리우스파의 문제를 논의하려는 니케아공의회였다. 당시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황제는 국가의 공금으로 회의의 제반 경비를 지출했고 회의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는 이단 정죄되었고, 회의 결과로 나온 것이 니케아 신조(A.D.325)이다. 이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에베소 공의회, 칼세돈 공의회가 이어졌다. 그 공의회 때마다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고, 결정과 아울러 정통과 이단이 가려지기도 했다. 회의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개입과 정치적 야합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납득이 갈 만한 충분한 과정을 거친 것도 사실이다.
중세의 이단 판정은 주로 교황권에 맡겨져 있었다. 교황은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그가 곧 지상의 그리스도였다. 그리니까 그리스도의 대리자에 속하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됨으로써 이단이 되었다. 중세의 이단 판정은 교회론적인 것이요 교황권에 맡겨진 것이었다. 독단적인 성격이 분명히 있었지만, 정해진 틀과 원칙은 있었다.
이후 특히 개신교는 여러 교파들로 분열되었다. 분열된 그들은 자신만이 정통이라는 의미에서, 정통주의 시대를 살았다. 교파별 독선주의 시대였다. 그래도 교파적 신학적 입장은 나름대로 선명했다. 신학적 원칙과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이단 판정은 다소 혼란스럽게 진행되어온 느낌이 있다. 물론 로마 제국처럼 통일된 국가 권력이 회의를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논쟁을 하든 전쟁을 하든 기독교적인 흐름 속에 역사적 사건들이 진행되어온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헌법이 규정하는 바 종교의 자유를 천명하는 세속주의(secular) 국가이다. 많은 다른 종교들과 공존하면서 경쟁적인 입장에 서야만 한다. 그리고 교파들마다 입장이 다른데, 서로의 입장에 대한 이해나 관심은 부족한 편이다. 교파 안에서 개교회들마다의 신앙과 신학도 개교회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다르면 신앙도 신학도 달라지고마는 형편인 것이다. 같은 교파의 교회들인데도, 저 교회에서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단에 대한 연구와 판정에 있어서 설득력있는 공적 신뢰 가능한 길을 열어가는 것이 시급하다.
오늘날 전세계를 위협하는 IS의 테러와 같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치유책은 '정의'이다. 더 강한 군사력의 보복이나 더 큰 두려움이 치유책이 될 수는 없다. 이단에 대하여 어떤 대책을 세워도 그것으로 이단이 근절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기존의 정통이라 여겨지는 교회들이 올바른 가르침과 윤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정통이라는 교회들의 무기력함과 정치적 권위주의적 왜곡이 이 나라에 이단이 창궐하는 어느 만큼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V. 지구화 시대의 기독교 언론
지구화 시대에 지구화된 언론은 어느 시대보다 신속하며 그 영향력도 강해졌다. 그러면서도 그 역기능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는 중이다. 그 언론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제안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가 이슬람의 테러를 당했을 때, 전세계 언론인들의 반응이 감격적이었다. "나도 샤를리이다." "샤를리를 쏜 것처럼, 나에게도 총을 쏘라."며 여러나라의 언론인들이 절규했다. 그리고 얼마 없어 이전까지 적대 관계였던 중동의 이슬람 나라들이 미국과 합세하여 IS를 상대로 싸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기독교 대(對) 이슬람"이라는 테러의 구도가 "칼과 펜"의 대결구도로 바뀔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 변화는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결구도가 그렇게 변화될 수만 있다면, 세계사의 미래는 조금 더 밝아질 것이 분명하다.
그런 내적 구조 변화가 한국교회 정통과 이단 대결 구도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의 정통과 종교권력이 동일시된다면, 종교정치권력이 스러져갈 때 기독교의 정통도 그만큼 위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부흥성장만 하면 어떻게든 간에 정통의 계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교파들은 자신들 안에서의 변화를 먼저 추구해야만 한다. 그런 분위기 전환을 추구하는 목소리들이 한국 기독교 언론들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군인의 묘비는 전쟁터 구석진 곳 무명의 동산에 세워지는 것이다. 옳은 길을 걷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사람만이 살아남은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 무명의 동산에 묻힌 목회자와 성도들을 찾아다니는 칼럼은 어떨까? 크고 많은 교회들과 무수한 성도들과 책들이 있는데, 마음 깊이 들어올 만한 것은 별로 없는 세속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기독언론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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