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이수민 기자] 만나교회 김병삼 목사가 소셜네트워크에 올린 글이 화제다.
그는 최근 페이스북에 "또 하나의 논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려 한국교회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특히 돌아가신 선친의 목회와 삶에 대해 이야기도 언급하면서 상호 존중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있는 한국교회 문화가 되어지길 바란다는 소망을 적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이다.
"또 하나의 논쟁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요즘 교회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나는 사례비를 얼마를 받습니다”어느 교회에서는 “교회 예산을 이렇게 공개합니다” 그래서 “이런 목사님은 참 깨끗합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는 참 본받을 만합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모두가 돈 문제입니다.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는 목회자의 사례비가 많다는 것에서 문제가 되고, 작은 교회에서는 생활비조차 힘든 목회자들 때문에 걱정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한 기독교 역사 가운데 ‘돈’의 문제는 늘 논쟁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자랑스럽게 재정을 공개하거나 깨끗함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일견 좋아 보입니다. 또한 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재정들을 공개하지 못하고 감추고 있다면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주장하는 경건함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일들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독선’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장하는 경건함이나 깨끗함이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이라면 ‘위선’입니다.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선적이 될 수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렇게 비판하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역시 의도적으로 위선적이나 독선적이 된 것이 아니지 않을까요?
특히 문제가 되는 대형교회 사례비와 어려가지 목회비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 단선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기본적인 합리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하지만 상황과 형편을 무시하는 자기중심적 생각들도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올해부터 저는 교회에서 사례비 외에 어떤 ‘목회비’도 받지 않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적으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목회비를 받지 않는 목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외적으로 굉장한 선언인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목회비 판공비라는 것이 자꾸 문제가 되니까,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모든 돈의 흐름을 정확하게 하기 위해 ‘교회법인’카드로 사용을 하고 증거를 남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필요한 목회비를 여전히 쓰고 있습니다.
사실,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교회들을 보면서 이런 ‘목회비’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정 규모가 되면 목회적인 차원에서 베풀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와야 하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상황에서 달라지는 것도 있죠. 또한 어떤 교회는 예산의 얼마를 ‘구제비’에 씁니다. 라고 내세우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대에 목회를 하면서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치 죄인인 것처럼 생각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성장과 부흥의 시대’를 지나며 지나치게 많은 건물 중심의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건물이 커지면 그 건물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헌금이 사용됩니다. 교회 헌금을 가지고 이렇게 건물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저도 건물 없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윗세대 분들의 생각과 유산이 또한 건물이라고 말이죠. 이제 한국교회는 세워진 건물을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한 사역이고, 더 이상 건물 중심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몇 년 전 교회를 새롭게 리모델링했습니다. 음향과 영상장비고 갖췄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기술과 장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할 사람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저희 교회는 그렇게 큰 교회가 아니지만, 목회자와 직원들이 일을 하는데, 1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급여를 줘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헌금이 그렇게 쓰여야 하는가?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가 헌금으로 건물이 아닌 구제와 선교로 쓰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100명이 넘는 사람 그리고 그 가족까지 생각한다면 목회를 통해 참 많은 사람들이 사역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입니다. 또 어떤 교회는 교육에 사명을 가지다보니 ‘건물’을 짓는데 헌금이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사회적 공헌에 가치를 두기도 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교회 개척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귀한 가치로 두기도 합니다.
좀, 서로가 격려하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만일 ‘나는 이런 목회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지 않도록 말이죠. 그래서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들이 필요하고, 그 마음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주장도 조금은 사려 깊게 생각할 수 있기를 말입니다.
또한 요즘 교회에 문제가 되는 일들은 ‘관계’에 대한 것들이죠. 교회 내부의 갈등…더욱 심각한 것은 부적절한 관계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예의’의 문제들이 아닌가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절,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생각, 극단적으로 치우쳐지지 않는 이성적인 판단들 말입니다. 목회자가 지녀야 하는 예절과 매너, 상대방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예의.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부터 조금은 목회 현장에서 벗어나 쉬며, 많은 생각들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면에서 ‘안식년’이라고 하는 기간입니다. 교회에서는 주일에 설교를 하면서 안식을 한다고 하니 그게 무슨 안식이 되겠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식’이란 가장 편안한 상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주일을 지키며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는 것을 안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안식은 ‘쉬는 것’보다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되리라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참 무거운 짐이 되기도 했던 일을 나누어 보도록 하죠. 참 단편적이었던 생각입니다. 누군가는 옳다고 생각할 수 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일이지만 참 마음 아팠던 일이죠. 제가 만나교회 담임이 되었을 때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아버님의 예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당시 만나교회는 많은 빚을 안고 있었기에, 은퇴하신 목사님에 대하여 월 사례비와 집을 전세로 얻어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에서 아무 이견이 없니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은퇴하신 목사님이 타는 ‘승용차’에 대한 부분이 저에게 걸렸습니다. 특히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무리 예우를 잘해 드린다 해도, 아들인 현재 담임목사보다 사례비를 더 드릴수도 더 좋은 차를 타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는 어느 정도 교회의 규모가 되면 목회자들이 좋은 차를 타는 것이 유행처럼 생각되던 때, 저희 4 남매는 아버님이 평생 목회를 하시는 동안 작은 차를 타시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동일한 규모의 목회자와 부흥사들에 비해 저희 아버님은 소나타 이상의 차를 타보시지 못했죠.
그런데 아프시기 바로 전, 교회에서 에쿠스라는 고급차를 사 주셨습니다. 문제는 그 차를 얼마 타 보시지 못하고 은퇴를 하게 되었죠. 그 때 저는 ‘옳음’ ‘바름’이라는 생각에 그 차를 바로 처분하고 조금은 작은 차로 교체를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아프더군요.
물론 아버님이 평생을 목회하시고 갑자기 돌아가신 후, 남겨진 유산이 없다는 것이 자식들에게는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은퇴 시 받은 집도 이미 교회에 돌려드렸고, 돌아가시며 통장에 남은 돈은 3만원도 되지 않았고, 마지막 ‘부의금’까지 모두 모아 장학금으로 내 놓았습니다. 자식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목회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겨주실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들이 목회를 하면서 아버지를 보살펴드렸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참 다른 목회적 환경에서 참 다른 목회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다양한 현장가운데 참 좋은 일고, 좋지 않은 일도 많겠지요. 그렇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일들이 많아지도록 노력한다면 좋겠습니다. 혹 우리의 주장과 경건이, 위선이나 독선이 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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