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면서 자라는 동안 여러 외부적인 영향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런 것들을 철학적으로 다룬 사람 중의 한 명이 칸트이다. 그는 '선험적 지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사람들이 판단을 할 때 작동하는 '무의식적인' 내면적 활동을 지적해 주었다. 과연 선험적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과 대답들이 수백년간 이어져 오고 있다. 가끔 이 말을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안에 내면화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이 있는 듯하다. 마치 자신의 생각이 선험적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확신한다.
훗설이라는 학자도 '선험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방법이나 과정은 약간 달랐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것을 제안하여 선험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한 경험적인 측면을 성찰하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어서 '북한'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에 어떤 사람은 '나쁘다'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불쌍하다'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간혹 '좋다'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북한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가리고자 하는 경향을 잠시 멈추고, 그런 생각이 거의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자신의 생각의 뿌리를 찾아가는 노력이다. 현상학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판단은 경험이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것이 많다고 한다.
우리의 무의식은 말 그대로 의식하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다. 역동심리학에서 우리의 무의식의 이면을 찾아가는 노력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내 주었다. 물론 그것은 한 개인의 심리치료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이 주로 다루는 무의식의 대표적인 작동원리는 '상처'와 그로 인한 '고통'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발견함으로써 의외로 많은 치료가 일어나기도 한다. 조심스럽게 사회적인 현상에도 무의식으로 내면화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추측해 본다. 그리고 그런 무의식중에서 주로 상처에 의한 것들이 작동한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정부에 대하여, 북한정권에 대하여, 미국이나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러시아나 일본에 대하여 제각각 판단하는 작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서로의 의견과 '다름'을 부각시키며 상대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고 정죄하며 거의 타협하지 못하고 갈등으로 빠지는 현상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다름을 부각시켜서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것을 실력이라고 가르쳐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판단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남을 판단하고 있는 나의 판단의 근원을 발견하여 치유된 후에 다른 이들의 눈에 있는 티를 제거해 주는 봉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판단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뱉어내고 있는 사람들은 잠깐만 멈추고 내가 하는 판단의 뿌리를 발견해야 한다. 기독교인처럼 가장한 가지와 줄기를 만들어낸 마귀의 뿌리를 찾아내어 잘라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상처, 죄책감 혹은 수치심이다.
기독교적 진리는 내가 먼저 주님의 은혜로 치유되고 구원을 얻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용서를 잃어버리고 비판에만 집중한다면 성경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탄"이 된 것이다. 심지어 주님까지도 넘어뜨리려고 하는 마귀의 도구일 뿐이다. 자기 눈의 들보를 뺀 후에 다른 이의 티를 지적하고 고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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