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것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기도의 시인이자 절대 고독의 시인인 김현승 님의 ‘눈물’이라는 시다. 약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병으로 죽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삶의 시련을 시로써 승화시키는 시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시인에게 ‘눈물’은 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아니라 부활을 준비하는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다. 그는 눈물을 온전하고 순수한 것,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눈물의 궁극적 의미를 ‘열매’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형상화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눈물을 웃음과 대비시키며 분위기를 경건하게 이끈다. 목사의 아들답게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해 시를 썼다.
그런가 하면 누구 못지않게 ‘눈물의 힘’을 잘 아는 이해인 시인은 “이별의 눈물은 기도이자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라는 순결한 약속”이라 했고,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계몽사상가인 볼테르(Voltaire)는 눈물을 ‘목소리 없는 슬픔의 언어’라 했으며, 독일의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는 명언을 남겼다.
본문에 새벽부터 우는 여인이 등장한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11절), 본문의 시작이 ‘눈물’이다. 눈물로 부활절 아침을 맞았다는 뜻인데 그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슬픔의 눈물
울고 있는 사람은 마리아, 그녀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었다(11절). 장소는 예수님의 빈 무덤 밖, 이번에는 홀로다. 베드로와 사랑받은 제자와 함께 이미 빈 무덤을 확인했고, 그들은 돌아갔다. 하지만 차마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슬픔의 눈물이다. 혼자 서서 무너지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소리내며 운다.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통곡한 것이다. 11절의 ‘울고 있더니’라는 표현은 현재분사형이고, ‘울면서’는 미완료형, 마리아가 계속 울었음을 강조한 표현들이다.
일곱 귀신들려 고생하다가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고 새사람이 된 후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헌신적으로 섬겨왔는데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자 안식일이 지나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주일이 되어 새벽에 서둘러 무덤으로 향유를 들고 달려왔는데 시신이 없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더라도 3일 정도는 그 영혼이 죽은 몸에 남아 있다고 믿었는데 3일도 안 된 시신이 사라졌으니 눈앞이 캄캄하다. 희망이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없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공허한 마음, 서러움에 북받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면서도 짙게 드리운 어두운 의심의 구름으로 인해 불안의 그림자를 떨치지 못하고 고민할 때 말이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다가도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하면 마치 믿음 없는 패잔병처럼 불안해하는 것, 기도하면서도 불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거다.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무덤 안에 있던 두 천사가 묻는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주님의 부활 약속을 믿지 못한 마리아가 계속 운다. 수없이 능력을 행하시는 모습을 봤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 생각이 얼마나 강했던지 주님의 임재까지 믿지 못한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14절). 만나 뵙기 원하는 분이 ‘수의에 싸인 분’이라서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 눈물은 필요 없는 눈물 아닌가? 시신이 없어졌다고 우는 건데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 그쳐야 하지 않나? 그런데 마리아가 울고 있듯이 우리도 쓸데없이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심지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걱정하며 운다. 뚝! 그쳐야 한다.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고 슬픔의 눈물은 거둬야 한다. 다만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슬픈 일이란 사실은 생각해야 한다. 그건 마리아처럼 울어야 할 상황, 마리아는 그 상황에서 한없이 울었다.
사랑의 눈물
얼마나 울었을까? 하지만 마리아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11절 뒷부분에 보면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무덤 안을 들여다봤다고 했다. 미련 때문일까? 아니, 이게 사랑이다. 때마침 동산지기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자 그에게 묻는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15절), 사랑하는 마음이 진하게 녹아 있는 질문이다. 울면서 물은 것, 그녀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다.
요즘 말로 마리아는 찐으로 사랑한 거다. 성경 기록에 의하면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떠나갔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몇몇 여자들과 함께 끝까지 지켜봤다(막15:47, 눅23:55). 그리고 슬퍼만 하지 않고, 시체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찾아간다. 지극 정성이다. 채찍과 가시 면류관, 그리고 못과 창에 의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예수님의 시신, 연약한 여인들이 그 상하고 찢긴 시체에 향품을 발라드린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절대 사랑이 아니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함께 무덤으로 찾아갔던 친구도 없이, 베드로와 사랑받은 제자마저 돌아간 상황 속에서 홀로 무덤 앞에 서서 울다가 동산지기로 보이는 사람에게 시신을 달라고 했다는 것, 이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게 바로 그녀로 하여금 ‘부활의 첫 목격자’라는 영예를 누리게 한 거다. 첫 목격자가 여성, 이건 엄청난 거다. 왜냐하면 당시 여성의 증언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굳이 첫 목격자가 여성이었다고 밝힌다. 만일 조작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 엄연한 사실이기에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 그녀가 첫 목격자였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모든 사람들은 죄다 실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실망 중에도 주님의 시신을 끝까지 찾아갔다. 강한 책임감, 그녀에게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본문에 이어지는 다음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19절), ‘문을 닫았다’라는 표현은 잠갔다는 거다. 문을 꽁꽁 걸고 숨죽이고 숨어있는 제자들, 그들의 상태는 실망과 두려움이었다. 또 눅 24장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의 상태도 마찬가지였고, 요 21장에 갈릴리 호수에서 예전처럼 고기잡이하던 베드로를 위시한 여러 제자들의 상태도 역시 실망과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다르다. 실망한 건 마찬가지지만 두려워 숨지는 않았다.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용혜원 시인은 “사랑이란 함께 걷는 것”이라며 “멀리 달아나지 않고, 뒤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라 했는데 비록 시신이라도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 이게 바로 찐사랑이다.
맞다. 부활의 증인이 되려면 마리아처럼 지극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끝까지 주님을 따르기는 쉽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증거한다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하신 질문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는 베드로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요21:19). 그렇다. 주님을 사랑해야 따를 수 있고, 그래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다.
가냘픈 여인 마리아는 아직 밝지도 않은 새벽 시간에 무덤 지역에 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한 말씀 그대로다(요일4:18). 천사들이 나타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천사에 대한 호기심이나 별다른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동산지기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한 말을 보면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 그래서 한 말이 “그 시신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자 홀로 성인 남자의 시신을 어떻게 가져간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직 이른 이 새벽에 한 여성이 남자의 시체를 껴안고 간다? 말이 되나? 또 그게 왜 하필 막달라 마리아인가? 은혜 입은 사람이 마리아뿐인가?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고, 예수님의 친동생들도 있지 않나? 그런데 마리아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런다. 계산이 없다. 두려운 것도, 사람들의 입방아도 상관없다. 마리아에게는 그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시신에 대한 강한 책임감이 있을 뿐이다. 마치 빌립보서에 표현한 바울의 고백과 같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기억하라. 마리아가 흘린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었다.
감격의 눈물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뜻밖의 소리가 들린다. “마리아야”(16절), 듣던 음성이다. 얼마나 그리운 음성인가? 얼마나 사랑하는 음성인가? 예수님이 목자의 음성으로 부르신다. “마리아야”, 감겨있던 영적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사랑의 음성이다.
마리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을 맞았다. “마리아야”, 그 한 마디에 마리아의 마음이 움직인다. 자기도 모르게 보인 반응은 “랍오니!”, 존경의 반응이다. 얼마나 감격했던지 두 팔로 주님의 부활체를 붙든다. 슬픔의 눈물은 이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 감격의 눈물이 된다. 용혜원 시인의 “아무것도 덧칠하지 않은 눈빛에 담긴 순수한 사랑의 기쁨에 마음껏 춤추고 싶다”고 한 것 같은 기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
♬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 부활의 주님! 내 마음의 가장자리까지 행복의 물결이 출렁이게 하는 그대, 마리아를 미소짓게 하기에 충분한 그대! 봄기운에 온 대지가 새 생명으로 잔치하듯 마리아에게는 온 천지가 다 새롭다. 기쁨으로 웃음이 터지고 마음에는 샬롬이 넘친다. 사랑의 꽃이 만발하는, 행복한 너무도 행복한 부활의 아침을 맞는다,
이거다. 주님을 만나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과 감격을 누린다. 만나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명령을 주신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게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부활 후 주신 첫 명령인데 제자들을 ‘형제들’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가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내 하나님이 제자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 무슨 변화 때문인가? 주님의 사랑이자 죽음에 대한 승리 앞에서의 연대성 확인 때문이다. 결정적인 사건은 성령의 임재,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이 있고, 제자들도 하나님의 영을 공유함으로 그들은 한 형제자매가 된 것이다.
단순한 친근함이 아니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영의 공유를 통한 하나됨, 그래서 신분이 같아진 것이다. 15장에서는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다(15:15). 그런데 이제는 친구의 등급을 넘어 한 형제, 이게 부활절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선물, 단순한 부활 약속이 아니라 우리가 성자 하나님과 같은 형제자매가 되었으니 우리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거다. 천사에게는 하나님이 주님이시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이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2:11), 주님이 우리 믿는 자들을, 이만큼 존중하시는 거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에 충분한 사랑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다. 마리아는 즉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절).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첫 목격자도 마리아, 첫 증거자도 마리아다. 초반 메시지가 ‘와 보라’(Come and see)였던 요한복음,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가라… 너는 전하라’(17절)로 바뀐다. ‘데리고 와서 보여주는 일’로 시작되었던 예수님의 사역이 ‘내보내 전하게 만드는 일’로 종결된 것이다.
부활의 증인 된 마리아, 그녀의 눈물이 떠오르는 태양을 반기는 아침 이슬처럼 전령사 역할을 했다. 눈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증인이 되었던 마리아처럼 부활 증인 되는 것을 최고 최상의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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