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관(下棺)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 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쓰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 시인
박목월 시인

'나그네' 시인 청록파 박목월(1915-1978)은 경남 생으로 경북 월성(현 경주)으로 이사와 살았다. 상경 한 후 박목월 시인은 어머니께서 설립하셨다고 알려져 있는 용산구에 위치한 효동교회 장로였다. 시인의 아들 박동규 교수(서울대 국문과 명예 교수)도 이 교회의 원로장로로 재직중이다.

​사람은 모두 이 땅의 나그네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간다(창 3:19). 지구는 모든 인류의 순례의 땅일 뿐이다. 창세기는 요셉의 입관(入棺)으로 마친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도 영원한 집이 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나그네처럼 왔다가 나그네처럼 가야 하는 이 세상의 순례자인 것이다.

​'하관(下棺)'은 먼저 간 시인의 아우의 장례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덮음으로 아우와 하직(下直)한다. 박 시인은 그저 속으로 울고 있다.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일제 시대 쓰여졌던 유명 詩 '나그네'에 대해서는, 박 시인은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소묘》에서 나그네를 "생에 대한 가냘픈 꿈과 그 꿈조차 오히려 체념한 바람같이 떠도는 '애달픈 꿈'"이라 했다. '나그네'에게 무슨 生에의 가냘픈 꿈조차 있으랴.

​하지만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고 성경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은 죽음 너머에 보이는 소망을 노래한다. '나그네' 메타포가 가진 역설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내신 참 "실로"(창 49:10, "참 안식을 주는 자" 곧 "메시야")가 아니었다. 요셉은 장차 유다 자손 중에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실로"가 나타날 것을 소망하며 흙으로 돌아간다. 이스라엘의 참 목자요 반석이신 분이 오실 것이다. 그것은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이요, 요셉은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소망을 보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요 요셉의 증조부였던 믿음의 원조 아브라함도 믿음을 따라 죽었으니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며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다(히 11:13-14). 아브라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친구'(사 41:8; 약 2:23)요 '신앙 나그네'의 모델이었다. 예수님도 '나그네'가 아니었던가.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 35).

조덕영 박사(신학자, 작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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