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목사)가 21일 오후 서울 강남구 소재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들에 대한 세미나를 ‘멀스베리 선교사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개최했다.
세미나는 예배, 논문발표 순으로 진행됐으며 예배에서 오덕교 목사의 인도로 안명준 목사(한국성서대학교 초빙교수)가 대표기도를 드렸다. 이어 현창학 목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가 로마서 12:1-2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다. 이어 장효제 목사(한국개혁주의 연구소 이사장)가 축도했다.
이어진 논문발표는 박응규 교수(ACTS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이은선 교수(백석대학교)가 ‘말스베리의 음악선교(1929~1955)’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드와이트 말스베리(1899~1977) 선교사(한국명 마두원)의 한국 선교사역은 해방 전의 평신도로서의 음악 선교사역과 해방 후의 목회자로서 고신교단과 대신 교단과의 선교사역의 2기로 구분된다. 말스베리의 선교사역은 국내에서 연구가 시작되고 진행되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어간다고 볼 수 있다”며 “말스베리 선교사는 30세가 되던 1929년에 북장로교 소속 음악 선교사로 국내에 입국했다. 그는 서우드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여 석사과정을 마쳤고, 이 음악원에서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 정도 교육활동도 했다. 시키고에서 있는 시세로 장로교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담임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던 주에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가르치던 곽인련 선교사가 서우드 음악원 총장에게 말스베리 부부를 음악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는 요청에 응답하여 평양에 오게 되었다. 그는 1929년 8월 말에 평양에 도착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외국인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서양 음악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많을 때였다. 특히 교회들은 교회 음악에 대한 요청이 많았다. 이러한 요청에 따라 1913년에 길선주 목사의 요청으로 모우리 선교사가 성가대를 조직했고 숭실전문학교에서는 음악대가 조직되었다. 이 음악대는 1917년부터 전국적인 순회 연주를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학교와 교회에서는 제대로된 음악 교육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1년 루츠, 부츠, 솔츠라는 세 명의 여성 음악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음악 교육의 수준이 향상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29년 말스베리가 입국하여 음악 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말스베리는 평양에 들어와서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외국인 학교를 중심으로 음악 교육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그는 일차적으로 평양 지역에 있는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 이론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했다. 말스베리는 장로교 계통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감리교 계통의 학생들까지 피아노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음악 이론을 가르쳤다. 그의 이러한 폭넓은 교육활동을 통해 김동진, 박태준, 채리숙 등 한국의 1세대와 2세대 음악가들을 배출했다. 그와 함께 평양 숭실전문학교 합창대와 밴드를 교육하여 평양과 전국을 순회하며 수준 높은 교회 음악을 들려줄 뿐만 아니라 복음 전파에 기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스베리 선교사는 음악 선교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36년 일본이 숭실전문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떠난 후에는 자신의 집에서 방지일, 박윤선, 강태국, 김홍전 등과 새벽기도회를 하면서 신앙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었다. 그는 결국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전영복 목사를 초청해 숭실전문학교에서 신사참배 반대 부흥회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추방당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신학을 공부하고 1948년 정통장로교회와 독립선교회 소속 목사 선교사로 국내에 다시 입국했다. 입국해서 KBS에서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주일 아침에 15분씩 음악방송을 하면서 피아노곡들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이때 한동일과 백건우를 가르쳤다. 최근에 이때 방송했던 24개 곡이 그의 제자 김애자에 의해 음반으로 제작되어 그의 음악 선교의 숨결이 현재까지 전해지게 됐다”고 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말스베리 선교사는 음악 선교사로서 한국 근대음악인 1세대를 양육한 공로자요, 신사참배에 대해 분명하게 반대하며 방지일, 박윤선, 강태국, 김홍전 등과 교제하며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음악을 통한 방송을 하며 한동일과 백건우를 길러내었다. 우리는 말스베리 선교사의 음악 선교사역을 통한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잘 이어받아 음악 선교의 고귀한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고 했다.

이어 이종전 교수(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가 ‘마두원의 해방이후 사역에 관한 고찰’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마두원 선교사가 한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929년 10월 24일에 입국해서 1940년 12월에 강제로 출국을 당할 때까지다. 이때 그의 사역은 주로 평양에서 이뤄졌으며 숭실학교에서 음악을 전담하여 가르치는 한편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며 “두 번째 시기는 그가 강제로 출국을 당한 후 1948냔 다시 입국하여 1977년 별세할 때까지다. 두 번째 입국하여 사역할 때는 1차 때와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음악 교육이나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2차 입국 당시 그의 신분은 목사였으며 그의 사역의 중심도 복음을 직접 전하는 일이었으므로 음악 교육과 활동은 제한적, 개인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마두원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인 1948년에 다시 돌아와서 약 30년을 이 땅 곳곳을 누비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다. 그는 1953년 이후 서울에 KCCC본부를 두고 활동했지만 이후에는 두촌에 정주해서 살면서 강원도 내륙과 속초를 중심으로 한 동해안 지역 선교를 중점적으로 감당했다. 교회 개척을 비롯해서 신학교, 성경고등학교, 병원, 구제 사업과 구호금 자원, 뿐만 아니라 ‘봉화’, ‘성별’등 잡지를 발행하여 각종 소식을 공유하고 신학과 계몽을 위한 기고문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의식을 깨어나게 했다”고 했다.
이어 “이렇게 다양한 사역을 하면서도 그는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질 것을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특별히 정통신학을 견지하는 교회이기를 위해서 노력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한 마음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라며 “그의 그러한 노력이 후기 근본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단정하는 분위기로 인해 그의 수고가 모두 부정되거나 소외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그가 지키려고 했던 정통신학과 그의 수고는 분명하고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후기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에 미친 부정적인 면에 대해섣 시대적 상황과 함께 공정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마두원 선교사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없었기 때문에 숨겨진 자료가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을 기점으로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가 발행했던 ‘봉화’, ‘성별’ 그리고 ‘두 길’에 담겨진 그의 사역과 사상에 대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고 미 발굴된 독리번교회 자료들은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사를 해석하는데 있어 귀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남송석좌교수)가 ‘마두원 선교사와 허암 김홍전 박사’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허암 김홍전은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화양며 지사리에서 태어났다. 전주 신흥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3월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경성 제대에 지원했으나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과의 연관성 때문에 허락받지 못하고 사립대학교에 입학할 경제적 여건이 안 되어 당시 관심 있어 하던 음악을 하기로 하고 1934년 4월부터 9월까지 동경에 가서 음악 개인 수업을 받았다. 부친이 당시 교감으로 섬기고 있던 메디올 여학교 교장의 추천으로 평양에 가서 1935년 10월부터 1937년 8월 사이 마두원 선교사 부처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사사 받았는데 이것이 마두원과 허암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고 했다.
그는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1936년 숭실전문을 그만둔 마두원 선교사는 그의 집에서 음악 교습을 했는데 김홍전이 이 때 그와 만났다. 1940년 마두원 선교사가 강제 출국을 당하기 전까지 김홍전은 그에게 음악을 배우고 교제했다”며 “마두원 선교사의 두 번째 사역기(1948~1977)에는 초창기 이후로는 허암과의 접촉이 많지 않았다. 특히 1961년 성경장로교회라는 교단을 마두원 선교사 등이 주도해서 형성되게 할 때 즈음 그와의 관계가 거의 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마두원 선교사가 ICCC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근본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일이 아닌가 짐작한다”고 했다.
이어 “허암은 1954년 미국에 가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드랍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이듬해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과 중동의 문화, 사회, 인류학과 언어 등을 연구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1955년 말부터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와 신학박사 학위를 하게 되었다. 귀국한 후 허암은 1959년에서 61년까지 서울역 근처에 사무실을 두면서 ‘민국일보’ 주간을 하게 되었으며 이 당시 관동대학 재단이사장, 극동방송 이사장, 외무부 외교자문 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임 김홍전 박사의 기여를 전반적으로 언급하면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려고 하면서 성경과 성경의 대한 바른 해석이 교회와 교우들에게 어떻게 은혜의 방도로 작용하는지’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허암은 자신과 성약교회 등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하는 일에 가장 신경 썼다. 성약교회와 독릡개신교회의 형성에 대하여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당시 상황에서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하는 이를 실천하고 그런 바른 교회를 눈에 ㅂ이게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게 되어다고 할 수 있다. 허암은 예배가 무엇인가 했을 때 하나님 앞에 예를 갖춰 절하는 것임을 말하면서, 지금으로서는 우리의 영혼의 무릎을 꿇어 하나님께 함께 절하는 것임을 강조했다”고 했다.
끝으로 이 교수는 “마두원 선교사는 허암에게 음악과 특히 피아노를 잘 가르쳐 주었고, 특히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음악을 잘 사용해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예배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나 바른 예배를 위한 노력에 있어서나 특히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나 하나님 나라라는 호방한 사상을 가지고 온 세사응ㄹ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일에 대해서 허암은 마두워보다 훨씬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며 “마두원에게서 잘 가르침 받고서 그보다 훨씬 뛰어난 족적을 역사에 남긴 허암 김홍전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최소안 이분들의 좋은 발자취라도 따라가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에 근거하여 개혁신학에 충실하게 가르쳐진 허암의 가르침을 잘 새겨야 한다. 이미 잘 가르쳐진 개혁신학이 잘 녹아 있는 귀한 가르침을 잘 배워 나가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결적 과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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