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18세기 영국은 프랑스 혁명과 같은 거대한 피의 혁명, 비등점(沸騰點/물이 끓는점)에 도달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법원은 기득권자들의 살인을 훈방조치로 판결했다면, 굶주림을 견딜 수 없어서 빵을 훔친 어린이에게는 자비 없는 교수형을 구형했다. 이런 법원 판결은 기득권자들에겐 정의로운 사회로 여겨졌지만, 힘없는 서민들에겐 불의한 절망적 사회임에 틀림없었다. 이 당시 법원의 방망이는 기득권자들 편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솜방망이였다면, 돈도 힘도 없는 서민들에겐 정의로 위장된 잔혹한 비수였다. 이런 영국의 상황 속에서 국민들이 프랑스와 같은 혁명을 염원한 것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작금의 대한민국 법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만만치않다. 얼마 전 서울서부지법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판결로 수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런 비상식적 판결 앞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킨 것은 예견된 현상이었다. 물론 그들의 폭력적 행동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법원은 그들의 불법성만을 노려보며 재판봉을 내려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법원이 더 이상 두 눈을 가리고 저울을 들어 올린 정의의 여신 역할을 포기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권위로 가득한 법복을 입고 재판장에 등장하는 판사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 일어서는 것은 단순히 판사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 아니다. 법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법의 입장을 대변하는 옳곧은 판사가 존경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법을 악용하여 자신의 사견을 편결에 인용하는 판사들를 국민들이 존경해야 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편견을 가지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가 판사들로 하여금 보수 편에 유리한 판결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단지 ‘적법절차’가 존중되는 법치국가를 세워 달라는 것 뿐이다. 정의의 여신이 상징하는 것처럼 두 눈을 가리고 사심없이 저울을 들어주길 바랄 뿐이다. 잠언은 우리에게 분명히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고 경고한다. 이 말씀이 비단 상업에만 해당하는 경고겠는가? 법원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그러면 적법과 절차란 무엇인가? 그것은 법 앞에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 삼권분립의 원칙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가 권력을 분리시켜 권력 남용을 방지함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시스템이다. 삼권분립은 단순히 권력의 분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것은 법을 객관화시키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법 자체는 곧 권력과 그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어떻게 다루느냐와 관련 된다. 법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 삼권분립의 목적이고, 법을 공정하게 다룰 때, 권력은 남용되지 않는다.

그 다음이 중요하다. 이렇게 법은 삼권분립을 통해 객관화 하고, 그 다음엔 법을 국민 개개인에게 평등하게 적용해야 한다. 이를 위한 시스템이 바로 적법(適法)과 절차(節次)를 준수하는 것이다. 국민이 법원의 판결을 공정하고 평등한 판결이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적법과 절차다. 만일 적법절차가 위배된다면 국민들은 그 판결의 공정과 평등을 믿기 어렵게 된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게는 선거 재판의 6.3.3원칙이 무시되어 한도 끝도 없이 지연된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 재판을 적법절차를 무시한 채 졸속으로 몇 달 안에 끝내려 한다. 헌재는 법에 명시된 대로 엄격한 적법과 절차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적법과 절차를 무시하면서 내린 헌재의 판결을 과연 어느 누가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국론은 극단적으로 분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책임은 판사들이 져야 한다.

지금까지 상당수 판사들은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후에 국민들에게 법원 판단을 무조건 존중하라고 강제하곤 했다. 이제 국민들은 이런 판결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어느 정도까지 끓고 있는지를 보여준 단편적 사건이 바로 서울서부지법 난동이었다. 이 사건은 어쩌면 공정성이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닫은 법원을 향해 권력 없는 그들이 낼 수 있는 유일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혹한의 추위를 이겨가며 공정한 판결을 외친 그들의 목소리가 개연성이 조금도 없는 이유로 거절된 젊은 이들의 항변이었을 것이다.

대통령 탄핵재판을 진행하는 헌법재판소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현재 헌법재판소 8인 대법관들을 향해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공정성’ 뿐이다. 적법과 절차를 엄중히 지켜달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이미 헌재는 공정성 위반사례가 너무 많다. 1월 26일자 서울신문 사설이 <헌재 편의대로 서두르고 미루고… 사법 권위 서겠나>라는 제언 하에 헌재의 불공정성을 꼬집을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칼럼을 통해 필자가 기대하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통치가 아니다. 자유민주의의 기본 원칙인 ‘룰 오브 로’(rule of law/법에 의한 통치)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법원 판결에서 우리 국민은 인민민주의의 ‘룰 바이 로’(rule by law/법에 의한 통제)가 진행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계속되는 헌법재판소의 재판 진행은 국민의 이런 우려를 확신으로 바꾸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판사들의 판단에 국민들이 복종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런 판결이 계속된다면 법원은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저항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판사는 법의 시녀일 뿐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판사는 그 평등을 법으로 실현하도록 세워진 봉사자다. 그러므로 판사가 옳지 못한 판결을 하고 그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경찰을 동원하여 공권력 뒤에 숨으려 한다면, 그 행위는 공권력을 사(私)권력화 한 것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국민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위임한 것은 법치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개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개인의 불법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공권력은 더 이상 국민이 부여한 공적권력으로 인정 할 수 없다. 법 집행이 아니라, 판사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경찰은 사적인 권력의 충견으로 여겨질 뿐이다. 두려운 사실은 공권력의 사유화가 묵인 될 때,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던 ‘독재’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법치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다. 18세기 영국처럼 대한민국 사법부는 적법과 절차가 무시되고, 이제 더 이상 법이 만인을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는 상황을 일상적으로 목격하고 있다. 영국은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깨어나 법치를 회복했다.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를 필두로 영적 대각성이 일어난 것이다.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깨움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같은 유혈 혁명을 막을 수 있었다. 프랑스처럼 폭력이 아닌 법이 다스리는 나라로 회복시킨 것이다. 불신자였던 켐브리지의 역사가 존 플럼(Johe Plumb)이 ‘휫필드와 웨슬리 부흥이 일반 대중에게 미친 영향이 없었다면 영국이 프랑스 혁명과 같은 혁명을 피했을지 의심스럽다’는 말은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나라의 혼란을 최소화 하려면 누구보다 교회가 각성돼야 한다. 교회가 각성되면 대한민국은 다시 적법과 절차가 존중되며 법치가 회복될 것이다. 사유화 되었던 법(rule by law)이, 다시 자리를 찾아 법에 의해 국민을 평등하게 통치하는 ‘법에 의한 통치’(rule of law)가 제 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가장 평화롭게 일어나는 길은 교회가 깨어나는 것뿐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