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이 땅에 태어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확정한 상태로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나온 후에야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습니다. 그 고민은 청소년기에 절정에 이릅니다. 즉, 사람됨의 정체성을 정리하고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후에 자신의 사람됨, 고유함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은 자신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확정 짓고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교회로 태어난 후 우리가 교회인 근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생명이니까요. 따라서 그 질문이 멈춘 곳은 위험한 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고귀한 존재,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신앙적 게으름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목회자의 부족한 설교 능력 탓으로만 돌리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영적으로 게으르게 살며 깨어 있지 않다 보니 중세 시대 가톨릭 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의존적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혹은 ‘평신도는 원래 의존적인 존재’라고 규정하다 보니, 깨어 있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송인수 – 평신도교회가 온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성경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달고 오묘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습니다. 이런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는 이들을 보호하시고 아끼십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는 일을 좋아하기에 하나님께서 버리십니다. 악인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으며 결국은 멸망합니다.
이일화 – 데일리 시편
아마도 스가랴서의 스가랴는 역대하 24장의 스가랴나 이사야서의 스가랴와는 다른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포로에서 귀환한 인물이며, 유력한 제사장 가문에 속한 상류층 계급의 일원이었던 것 같다. 스가랴는 포로귀환 공동체 가운데 매우 영향력 있는 지도자였을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이 절망적인 순간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선지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어려움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포로 귀환자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영광이 거의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실망했으며,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신앙적 결속은 점차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의 상황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스가랴서의 메시지이다.
장세훈 - 스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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